
W. 유쫑
몸이 떨어져 있는 커플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통화를 하며, 같은 주파수의 라디오를 듣는다거나 같은 영화를 본다거나. 작은 기계 너머로 들려오는 사랑스런 목소리와 함께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연인은 서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종대도 크리스와 통화를 하며 같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 새벽까지 함께 라디오를 들은 적은 있었으나 영화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오늘 이 영화를 함께 보자는 약속이 있던 것도 아니다. 종대는 그저 여느 때처럼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메신저로 크리스에게 알렸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가 가슴 저리는 클라이막스 장면에 들어서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종대에겐 비밀로 한 채 따라서 영화를 보고 있던 크리스가 전화한 것이었다. 영화가 남녀 주인공이 시간을 뛰어넘어 사랑한다는 내용이었기에, 크리스가 저와 같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종대는, 현실의 저희 둘은 공간을 뛰어넘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통화도 끝이 났다. 영화의 애잔함과 크리스의 목소리가 남긴 여운에 종대는 몸을 소파에 깊게 뉘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때 도어락 소리가 울렸다. 종대는 구부렸던 등을 세워 현관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야 영화를 보러 나갔던 경수와 종인이 웃는 얼굴로 집안에 들어섰다.
“둘이 데이트 했어?”
“그래 좀 했다.”
먼저 들어온 경수가 여전히 웃으며 종대에게 맞장구쳤다. 예전 같았으면 남자 둘의 외출이 데이트라고 지칭되고, 더군다나 그 말이 게이에게서 나왔다는 것에 질겁했을 경수는 이젠 이 정도 장난은 여유롭게 맞받아치는 여유가 생겼다. 종대는 평소라면 그런 변화가 기뻐 더욱 더 장난을 치거나 소리 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어떤 여운이 아직도 가슴 한가운데서 가시지 않은 것이었다.
종인과 경수는 누가 먼저 씻을 것인지로 이야길 나누다가 경수로 결정 나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바로 뒤, 경수는 씻으려고 종인은 물을 마시려고 다시 나왔다. 종대도 그만 자려고 몸을 일으켜 터벅터벅 부엌을 지나 계단으로 향하는데 종인이 종대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 있냐는 종인의 말에 종대는 틀 것 같지 않던 발을 부엌으로 돌렸다. 그리곤 의자를 꺼내 털썩 앉아 식탁 위에 팔을 걸치고 엎드려 누웠다. 종인은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웬일로 기운이 없어요, 우리 김종 형이.”
종인은 동그란 가마가 보이는 종대의 머리를 한 올 한 올 쓰다듬었다. 평소답지 않은 종대가 퍽 걱정되었다. 종대는 종인도 볼 수 있을 만큼 크게 한숨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일 뿐 그의 물음엔 답하지 않았다.
“우리 동생. 내일 연습 가는데 안 피곤하겠냐. 한밤중에 영화는 무슨 영화야.”
“피곤하죠. 그래도 좋아하니까, 안 힘들어요.”
종인이 느리게 답했다. 종대가 고개를 드니 종인은 손을 거두었다. 종대는 종인의 대답이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종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침, 종대는 유난히 눈이 일찍 떠졌다. 딱히 졸리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아 잠을 청하려고 이불을 고쳐 덮고 눈을 감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깥의 빗소리만 더욱 선명히 들릴 뿐이었다. 할 수 없이 크리스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내놓고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세수를 하고 기계적으로 아침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오니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부터 향긋한 커피향이 코를 찔렀다. 주말, 이른 아침부터 여유를 즐기며 모닝커피를 마실 만한 사람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니 역시나 거실 소파 등받이 위로 나란히 포개져 있는 민석과 루한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형들일 줄 알았다.”
종대의 목소리를 들은 민석과 루한이 아침인사를 건넸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그냥요.”
평소라면 형들이 할 말은 아니라고 맞받아 장난을 쳤을 종대는 짧게 답하곤 찬밥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곤 뜨뜻해진 밥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TV에선 동물 관련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재방송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민석과 루한은 재밌게도 보고 있었다.
“형들, 방에서도 같이 있고, 거실에서도 같이 있고. 안 질려요?”
종대가 물었다. 다른 식구들이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도 이런 의문 쯤 한 번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친한 친구끼리는 같이 살면 의 상한다는데 둘이는 사이가 멀어지긴커녕 싸우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매일 얼굴 보는 게 질리지도 않는지 둘이서 외출도 잦았고, 보통 식구들이 따로 따로 밥을 챙겨먹을 때도 둘은 항상 같이 준비하고 같이 먹었다. 하지만 루한은 별다른 고민 없이 즉답했다.
“민석이가 평일엔 너무 바쁘잖아. 그 때 못 본 만큼 봐야지.”
루한이 종대를 보며 말하자 민석이 옆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자 루한이 홱 고개를 돌려 민석을 보고 따라 웃었다. 닭살 돋는 멘트에 종대는 입안에 있던 밥알과 물이 밥그릇으로 도로 나올 뻔 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남부럽지 않은 애인이 있는데 커플인지도 아닌지도 모른 형들에게 왜 이런 염장을 당해야 한담. 종대는 시기인 것도 오기인 것도 같은 마음에 밥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방으로 돌아와 크리스에게 답장이 왔나 메신저를 확인해보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지 읽지 않았다는 숫자 표시가 남아 있었다. 종대는 일단 루한과 민석이 염장을 질렀다는 문자를 폭탄으로 보내 놓았다. 날씨도 우중충, 기분도 우중충해서 연습 갈 마음이 안 났지만 오늘은 다다음주에 있을 락페스티벌에서의 곡을 정해야 했기 때문에 천천히 준비를 시작했다.
몇 년 동안 호흡을 맞춰 온 밴드 멤버들이 종대의 이런 울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선곡이 끝나고 나선 연습보단 장난치고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멤버들의 노력에 종대도 즐겁게 웃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다시 혼자가 되자 우울함은 더 무겁게 종대를 짓눌렀다. 원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예상 밖에 찾아온 웃음이 즐거웠던 만큼 그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졌다.
빗줄기를 맞을수록 무겁게 느껴지는 우산과 주저앉을 것만 같은 다리를 움직여 힘들게 도착한 집은 여느 주말과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새 식구 타오의 어눌한 한국어 소리도 소음에 섞여 있다는 것.
“종대, 밥 먹어야지.”
“먹고 왔어요.”
준면의 다정한 목소리에 종대는 거절하는 게 왠지 미안해 애써 웃으며 거짓말했다. 먹고 왔으니 안 먹어도 된다는 건 당연했지만 그래도 전에는 못 먹어서 아쉽다며 징징거리던 종대였기에 준면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 같아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눅눅한 공기와 끈끈한 몸에 종대는 기계적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랬더니 집에 왔을 땐 1층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찬열과 백현이 그 새 2층 거실을 점령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냥도 아니고 부끄러운 애정 행각이라도 벌이고 있었는지, 종대가 욕실 문을 열자마자 백현이 찬열을 발로 차 우당탕하는 소리가 났다.
“저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 하십쇼.”
수건을 뒤집어쓴 종대가 비꼬는 투로 말하며 거실을 지나쳤다. 두 사람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 하, 하긴 뭘 해.”
“야, 넌 그렇다고 사람을…….”
백현이 방으로 들어가는 종대의 뒷모습에 대고 변명했고 찬열은 신음소리를 내며 아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종대는 아무 대꾸도 없이 방문을 닫을 뿐이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쳐내며 말리는 동안 피부가 당기는 느낌도 받았지만 오늘은 과감히 스킨로션을 생략하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크리스에게 메신저 답장을 보내고 잠이 올 때까지 게임이나 하려고 했지만 의욕도 재미도 없어 금방 꺼버렸다. 인터넷을 켜 메인에 떠 있는 이슈 기사를 훑어보다가 그것도 이내 그만 두었다. 그리곤 마지막 선택으로 갤러리에 들어갔다. 종대의 손은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더 오래된 사진들이 있는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엔 크리스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고 그건 보는 종대를 그대로 물들였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자신을 좀먹고 있던 우울함이 크리스가 그리워서임을 깨달을 찰나 조용하던 바깥에서 언성을 높이는 말소리들이 흘러들어왔다.
“방 뒀다 뭐 하냐? 하고 싶으면 너네 방 들어가서 하라고. 남한테 피해주지 말고.”
“피해? 이런 게 피해냐? 우리가 너 올라올 줄 알았어? 웃기는 소리 마. 너야말로 피해망상인 거 아니냐?”
“너네가 이렇게 붙어먹고 있을 줄 알았으면 안 왔지. 아주 같은 층 썼으면 발정난 거 참느라 큰일 났겠네.”
“미친 새끼야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야야……. 도경수 너도 말이 심하다. 우리도 너랑 같이 있었으면 안 그랬겠지.”
“왜 씨발. 난 더 하고 싶은데. 쟤 눈치 보면서 설설 기기 싫거든.”
“그러니까 내가 그쪽을 고운 눈으로 못 보는 거라고. 더럽게….”
더럽게. 어느 새 제 감정을 죽이고 바깥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종대는 경수의 마지막 말에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은 필요 없었다. 경수가 용건이 있어 올라온 모양인데 타이밍이 안 좋아 마침 애정행각을 벌이던 찬열과 백현을 목격한 것이 틀림없다. 종대는 눈물로 젖은 눈가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마주 보고 있는 경수와 백현 사이에 찬열이 그나마 차분하게 말한다고 끼어 있었다. 문을 연 종대에게 백현은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앞의 경수가 눈을 서슬 퍼렇게 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현 역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을 터였다. 보지 않아도 방 안에서 들은 소리로 셋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백현은 뒤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경수에게 사납게 쏘아대기 바빴다. 결국 종대가 백현의 말을 잘라 먹었다.
“그만 해.”
종대가 목소리를 내자 싸우고 있던 세 사람이 그 제야 종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잠시 적막이 흐르다가 찬열이 깜짝 놀라선 울었냐며 조심스레 물었지만 종대는 찬열을 스윽 보고 답은 하지 않았다.
“일단 경수한텐 미안하다고 대신 말할게. 한 집에 살면 조심했어야 됐는데. 미안.”
“야, 왜 네가 미안하다고 해.”
백현이 말했다. 찬열의 말을 듣고 보니 종대가 운 모습이기도 했고, 종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서 목소리는 한층 침착해져 있었다.
“근데 너도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이쪽이 더럽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애. 네가 어떤 여자 좋아하면 그 여자를 알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거랑 똑같다고. 무슨 감정도 없는 짐승인 줄 아나본데…….”
나는, 난 지금도 크리스 형이 너무 보고 싶어 죽겠다고. 종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마치 튼튼하던 건물 한 채가 테러를 당해 무너져 내리듯 부서진 종대를 보는 경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찬열이 백현을 지나쳐 종대에게 다가가 깊이 안아주었다. 백현도 충격을 받은 듯한 경수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미안이라 짧게 말하곤 종대에게 다가갔다. 찬열과 백현이 울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종대를 간신히 달래고 일으켜 침대에 뉘이고 다시 거실로 나올 때까지 경수는 그 자리에 언 채로 서 있었다. 더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었다. 이 집에서 종대를 만나고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그 이후로는, 바로 지난밤만 해도 종인과 데이트를 했네 어쩌네 농담까지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자기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기가 막힌 아집은 화가 나 이성을 잃으면 튀어나올 만큼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나보다. 게다가 저를 스스럼없이 대하려 노력하고 늘 주변 사람들을 밝게 만들었던 종대가 제가 생각 없이 지껄인 말에 저렇게 무너지다니. 믿을 수 없었다. 찬열이 앞으로 주의하겠다며 미안했다고 인사를 건네서 경수도 제가 더 미안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1층으로 내려가는 발은 무겁기만 했다. 애초에 제가 2층에 올라온 게 종대에게 친구 결혼식 축가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는 건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
눈물은 계속해서 관자놀이를 흘렀지만 격한 감정은 많이 죽은 것 같아 종대는 숨을 고르고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눌렀다.
-응, 종대.
하지만 크리스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 숨 죽었다고 생각한 가슴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고 그러다 못해 뻥 터지며 울음도 터져 버렸다. 종대는 울음이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지도 않고 오로지 울기만 했다. 크리스의 다정했던 목소리가 다급하게 바뀌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것도 종대가 처음 울음을 터뜨린 때에 딱 한 번이었을 뿐 다시 반복되진 않았다. 그저 종대가 스스로 진정될 때까지 간간이 종대의 이름을 불러주며 잠자코 기다렸다. 한바탕 울고 난 종대는 제 눈과 입술이 퉁퉁 부어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묵묵히 기다려준 크리스 때문에, 그게 좋아서 어느 새 따뜻해진 마음을 담아 말했다.
“형이……, 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정말?
“응.”
하도 울어서 이응이 두 개나 들어간 한 음절의 답엔 코맹맹이 소리가 잔뜩 배어있었다.
-내가 지금 거기로 갈까?
크리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하지만 이걸로 됐다. 아직 못 볼 날이 더 많은데 이번 일 하나도 견디지 못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그 ‘약속’을 이렇게 깨버리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가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다. 종대는 진심으로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괜찮아?
“응. 그냥, 나 잘 때까지 책 읽어줘요. 어차피 눈 부어서 좀 있으면 잠들 거 같아.”
종대의 말에 끙차, 하고 일어나 책을 고르러 가는 크리스의 움직임이 소리로 전해져 왔다. 무슨 책 읽어줄까 하는 크리스의 물음에 종대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고 답했고 크리스는 그거 읽어주면 재밌어서 오히려 잠이 안 오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했다. 책을 집은 크리스가 침대에 앉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낮고 잔잔한 목소리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눈물로 수분이 빠져나간 눈은 깜빡이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종대는 창밖으로 빗줄기가 많이 약해진 것을 보며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을 점차 늘려갔다. 뜨거운 핸드폰으로 흘러나오는 크리스의 목소리가 달콤한 자장가 같았다.
우울함의 원인이 밝혀지자 종대는 하루만에 다시 푹 잘 수 있었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니 해는 어느 새 중천에 떠 있었다. 종대는 몸을 일으켜 앉긴 했지만 여전히 뜨지 못한 눈을 비비다가 문득, 날씨가 화창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겁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고 엉덩이를 가볍게 일으킨 뒤 창가에 매달려 밖을 보았다. 크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어서인지 꿈에 그가 다녀간 것도 같은데.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 꿈에 다녀간 크리스가 이 맑은 날씨를 선물로 준 것만 같았다.
종대는 기운 넘치게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갔다. 준면은 다시 밝아진 종대의 모습에 내심 안심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평범한 인사를 건넸다. 오래도 잔다는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종대는 장마가 끝났다는 소식을 준면에게 확인 받으며 신나할 뿐이었다.
경수는 두 사람이 부엌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방에서 기어 나왔다. 슬그머니 다가오는 걸음에 경수가 어제 일을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종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준면 곁에서 알짱거리던 걸 멈추고 팔랑팔랑거리는 걸음으로 경수에게 다가갔다. 종대가 먼저 인사를 건네니 경수도 같이 인사했지만 그 다음부턴 우물쭈물, 사과 한 마디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제 너 때문에 기분 안 좋았던 거 아냐. 전부터 좀 그런 일이 있었어.”
결국 종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경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눈만 굴려 방긋방긋 웃는 종대의 얼굴을 몇 번 올려다보다가 입을 뗐다.
“그, 그래도. 미안해…….”
“난 괜찮아. 지인짜로. 백현이랑은 화해했어? 둘이 어제 겁나 살벌하더라.”
종대는 경수의 작은 어깨에 손을 올려 뒤를 돌게 하곤 소파로 데려가 나란히 앉았다. 경수는 스스럼없는 종대의 행동이 왠지 배려 넘친다고 생각했다.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 없을 것 같다. 종대에게 그 생각을 직접 전하진 않았지만, 하트 모양의 입이 돋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변백현, 걔야말로 진짜 괜찮을 듯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장마가 끝나자 저녁이 되어도 하늘은 푸르스름하게 밝았다. 바야흐로 진짜 여름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데이트를 나갔던 찬열과 백현은 밝은 하늘처럼 명랑하게 돌아왔다. 역시 여름엔 집에서 에어컨 키고 있는 게 최고의 데이트라는 백현의 말에 경수가 이렇게 저렇게 대꾸하며 둘이 편하게 대화하는 걸 보니, 정말로 제가 자는 사이 이미 화해한 모양이라며 종대는 진심으로 안심했다. 오늘 크리스와 메신저를 주고받으며 어제 셋이 싸웠던 걸 알려준 종대는 백현과 경수가 잘 된 거 같아 다행이라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그 때 찬열이 종대에게 다가와 편지 한 통을 건넸다.
“크리스……? 이거 크리스라 읽는 거 맞아? 너네 형이야?”
편지 봉투를 보고 어리둥절해 있던 종대는 찬열의 물음에 봉투를 홱 빼앗았다. 봉투엔 정말 Kris라는 영문이 크리스의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대박, 대박, 뭐야, 웬일이야를 번갈아가며 외는 종대에, 춤 연습을 가 이 자리에 없는 세훈과 종인을 제외한 식구들이 무슨 일이냐며 종대를 바라보았다. 급한 마음에 풀로 붙인 봉투 뚜껑을 비쭉배쭉하게 찢어 편지지를 꺼내고 내용을 확인하니, 예상은 했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었던 크리스의 편지가 맞았다. 종대는 제가 아주 잘 아는 글씨체로 쓰인 빼곡한 편지를 보자마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근데 일요일에도 편지가 와?”
종대는 이제 온 집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종대를 보며 웃은 찬열이 종대가 떨어뜨리고 간 봉투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아니. 아닐걸?”
“나도 내 평생 그런 얘긴 처음 들어보는데.”
백현과 민석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꾸했다. 금요일에 온 우편물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준면이 빠트린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찬열이 편지를 갖고 올 수 있던 건 우편함 입 사이로 편지가 꽂혀있어서 눈에 띄었기 때문인데 그걸 준면이 못 봤을 리도, 우편함 속에 빠뜨렸던 종이가 발이 달려 우편함 입까지 기어 나왔을 리도 없을 테니까. 식구들이 무슨 일일까 하고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한바탕 휘젓고 온 종대가 자기가 읽어 줄 테니 같이 보자며 식구들을 거실 한가운데로 모으는 바람에 그 의문은 쉽게 잦아들었다. 찬열도 다른 식구들을 따라 종대에게 가며 들고 있던 편지봉투를 소파에 대충 던져 놓았다. 모두가 종대의 낭독에 귀 기울였지만, 그 편지봉투에 우표가 붙어 있지 않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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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와 크리스가 본 영화는 '시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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