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멋지잖아

※김미희「넌 멋지잖아」를 모티브로 쓴 글입니다


W. 유쫑






“루한, 세상에 자기가 자기이기 때문에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참 살맛날 거야. 그치?”


루한은 민석을 바라보았다.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듯 참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민석은 매니저의 눈치를 살피며 루한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너 자체를 좋아해준다구. 네 팬들처럼.”


루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팬들? 팬들이 나를 얼마나 안다구.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민석의 해석 덕분에 매니저의 말을 알아들었으므로 일단은 넘어갔다.


“허, 민석 씨는 참 좋겠어요! 루한 같은 놈이 애인이라. 내가 여자였으면 아주....... 아, 둘한테 뭐라고 한 건 아니구요. 하, 하하.”


설날 전까지 연휴 특집으로 녹화를 몇 개씩이나 한 루한은 연휴 당일이 되어 오래간만의 휴식이 찾아오자 민석을 제일 먼저 찾아갔다. 매니저의 차로 민석을 직접 데리고 오는 사이, 집에 먼저 돌아와 있던 매니저는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루한과 민석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 지독한 술 냄새가 둘의 코를 찔렀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듯한 매니저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다가 혼자 웃다가 하더니 거실 바닥에 대 자로 뻗고 말았다. 루한과 민석은 누운 지 1초 만에 코를 고는 그를 방에 데려다 눕히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민석은 루한에게 ‘이제 뭐할까?’라는 질문도 않고 어질러진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앉아 있어. 내가 치울게.”


루한이 허리를 굽혀 술병을 품에 모으는 민석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런 꼴 못 보는 거 알잖아.”


과연 그랬다. 얼마나 깔끔한 성격인지 루한이 시간 비는 틈틈이 불시에 찾아가도 민석의 집은 항상 깔끔히 정리정돈 되어 있었다. 모처럼 만의 휴가에 모처럼만에 자신의 집에 데려온 거라 제대로 손님 대접을 해주려고 했는데. 민석이 쉽게 그만두지 않을 걸 알았기에 루한은 피식 웃고 옆에서 거들 뿐이었다.

일단 오늘은 밤도 늦었고 하니 영화를 보는 걸로. 영화관 분위기를 내려고 전자렌지에 돌린 팝콘에, 둘 다 워낙 좋아하다보니 아무 생각 없이 내린 커피의 궁합은 꽤 애매해보였다. 소파에 앉아 팝콘과 커피를 보며 민석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니 함께 웃던 루한이 그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었다.

영화는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흥행 영화였지만 루한은 왠지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매니저와 민석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기가 자기이기 때문에 좋아해준다? 너 자체를 좋아한다?


“왜? 재미없어? 다른 거 볼까?”


화면을 보지 않는 루한을 눈치 챈 민석이 루한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루한이 말없이 민석을 직시하고만 있자 민석은 영화를 정지시키고 다시 한 번 왜 그러냐 물었다.


“피곤하면 자자. 내일부터 놀면 되지.”

“민석아.”

“응?”

“넌 내가 왜 좋아?”

“......어?”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지만, 날벼락 같은 소리에 민석은 저도 모르게 되묻는 소릴 냈다. 하지만 루한은 다시 말하지 않고 진중한 눈빛으로 민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민석이 부끄럽게 뭘 그런 걸 묻냐고 시선을 피하니 루한도 피식 웃곤 다시 소파에 몸을 뉘었다. 루한이 영화를 재생시켰지만 그 후로 민석은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뭐야, 사람 당황스럽게 만들어놓고. 게다가 그 눈빛은 답해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무겁고 끈질겼었다. 민석은 저와 달리,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게 위기에 처한 주인공의 상황에 완전히 몰입한 것 같은 루한을 곁눈질하며 볼에 바람을 잔뜩 넣었다.


루한이 빠르게 포기한 덕에 두 사람은 나름대로 알찬 데이트를 하며 설 연휴를 보냈다. 하지만 민석의 마음속엔 루한이 했던 말이며 그 눈빛이 남아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민석은 루한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왜 좋냐고 물어보면 딱히 뭣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저, 루한이 좋을 뿐이니까.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설계도면 구석엔 ‘왜?’, ‘why?’, ‘몰라.......’, ‘흠’ 과 같은 영양가 없는 말들이나 캐릭터 모습인 루한의 낙서들이 점점 늘어갔다. 루한(鹿晗)이란 이름은 새벽사슴이라는 뜻. 이름 뜻에 민석은 자신이 그린 루한의 얼굴에 사슴뿔을 그려 넣어 보았다. 자기가 그려서인지 사슴뿔이 있어도 귀엽기만 했다. 아니, 그냥 루한 자체라서 뭘 해도 어울리는 듯했다. 연애 3년 차에 아직도 콩깍지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래, 그냥, 루한이기 때문에.


“아......! 그거였어!”


민석은 입까지 벌리며 답을 얻었다는 표정을 리얼하게 지어보였다. 마침 직원들 사무실을 지나가던 건축사무소 소장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빠져 있는 민석을 발견하곤 그에게로 다가왔다.


“김민석 씨, 고민 노트 삼으라고 준 설계도가 아닐 텐데?”

“헛.... 죄송합니다. 소장님.”

“정 안 풀리면 말해. 내가 개인 면담해줄 테니까.”


소장이 농담을 던지며 가던 길을 가니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키득거렸다. 무안해진 민석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죄송하다 인사를 하곤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루한에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이미 충분한 답을 얻은 상태였다. 선을 긋는 민석의 손이 방금 전과 다르게 시원시원했다.






민석이 일하는 건축사무소와 가까운 곳에서 인터뷰를 딴 루한은 일을 마치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케이블 토크쇼 녹화를 마치고 인기 있는 영화배우의 인터뷰를 땄기에 꽤 피곤했지만 루한은 건축사무소 입구에서 덜덜 떨며 민석을 기다렸다.  


“흐어,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야근을 며칠을 한 건지 민석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시꺼맸다. 루한은 코를 훌찌럭거리면서도 별로 안 기다렸다며 민석을 안았다.


“몸도 얼었는데 뭘. 차에서 기다리지.......”


민석이 차가운 루한의 몸을 녹여주려는 듯 더 꼭 안으며 말했다. 루한은 제 눈 밑에서 아른거리는 민석의 뒤통수를 보다가 민석을 잠시 떼어냈다. 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한을 바라보고 있으니 루한은 잠겨있던 코트 단추를 푸르고 코트 자락 사이로 민석을 다시 넣었다. 코트 바깥과 다르게 안쪽은 따뜻했고, 그 따뜻한 공기를 타고 루한의 체취가 민석에게 전해졌다.

아, 말할까 말까. 민석이 망설이는 사이 루한이 이제 그만 가자며 민석을 살살 흔들었다.


“루한.”


민석이 짐짓 진지하게 루한을 부르니 루한이 놀란 눈을 하고 민석을 보았다.


“왜? 왜 그래, 민석아. 무슨 일 있어?”


루한이 몇 번을 물어도 민석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말해야겠다고 결심해서 입을 열긴 했는데 역시 막상 말하려니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좋아.”

“응?”

“이, 이런 것도 좋아!”


루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며 속사포로 떠든 민석은 말을 마치자마자 주차장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새삼스러운 고백에 동그랗게 뜨인 루한의 눈이 먼저 가는 민석을 바라보다가 곱게 휘어졌다. 웃음이 새어나와 차갑고 어두운 밤공기에 새하얀 입김을 만들어냈다.

민석을 바래다주고 집에 오니 먼저 도착해있던 매니저가 팬레터들을 내밀었다.


“그 중에 민석 씨가 보낸 것도 섞여 있더라. 내 차까지 뺏어서 민석 씨 데려다주는 너나, 손 편지 써주는 민석 씨나, 아주 열남 났다 열남 났어.”


매니저가 부러운 마음에 비아냥거렸으나 루한은 차 잘 모셔놨다는 말로 가볍게 대꾸하곤, 민석의 편지를 찾기 위해 팬레터들을 꼼꼼히 뒤졌다. 새하얀 종이에 금박 테두리가 붙은 봉투. 거기에 민석의 글씨체로 루한과 민석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루한은 그 심플함이 민석다워 웃음을 흘렸다. 여유롭게 웃었지만 가슴은 뭐라고 썼을까 하는 기대감 반 호기심 반에 쿵쿵 뛰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뜯은 봉투 안의 편지지엔 참으로 간결한 문장 하나만이 써 있을 뿐이었다.


[넌 멋지잖아.]


루한은 제가 편지지 뒷면을 잘못 본 줄 알고 종이를 뒤집어봤지만 봉투를 열었을 때 보이던 백지는 네가 본 게 앞면이 맞다고 외쳤다. 혹시 불에 그을리면 글자가 보인다는 비밀 편지인가 싶어 급하게 가스 불을 켜 확인해보았지만 종이는 뜨거워지기만 할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루한은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몇 번 씩이나 뒤집어보며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석아, 나 편지 봤는데.”

-어?


차분히 전화를 받던 민석이 ‘편지’란 말에 하이톤이 되었다.


“편지. 이거 제대로 온 거 맞아? 너 앞 장 빠뜨렸어?”

-아, 아냐. 며칠만 더 기다려봐. 편지 더 갈 거야.


민석은 잘 자란 말을 남기고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편지가 더 온다고? 그럼 앞으로 올 편지에 이 뒷이야기가 쓰여 있다는 건가. 루한이 편지지를 붙잡고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려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 제 애인이 시키는 대로 조금 더 기다려볼 수밖에.

그 날 이후 루한은 아무리 피곤해도 매니저를 졸라 팬레터를 받아냈다. 유명한 연예인이 아닌 리포터, 케이블 방송 패널로 나오는 방송인인 루한이었지만 워낙 출중한 외모로 팬레터를 받을 만큼의 팬들은 있었다. 팬레터들 사이엔 민석의 편지가 꼬박꼬박 숨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루한의 궁금증을 단번에 풀어주진 못했다.


[다정하잖아.]

[따뜻하잖아.]

[목소리도 너무 좋잖아.]

[날보고 손을 흔들어주고, 그 손으로 내 손도 꼭 잡아 주잖아.]

[맛있는 커피도 내려주잖아.]


와 같이 그 한 줄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었다. 우체부가 쉬는 일요일, 마침 스케줄이 없던 루한은 2주 동안 민석에게서 온 여섯 통의 편지를 방바닥에 쭈욱 늘어놓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섯 개로 나눠진 말들이었지만 결국은 루한이 민석에게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들. 그냥 민석이니까, 민석이 좋으니까 해줄 뿐인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다 뭘 어쨌다는 걸까.


“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루한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래, 설마 우리 루한이 드디어 달달함에 미친 건 아니겠지.”


내일 스케줄을 알리러 온 매니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루한을 보고 경악했다. 2주 내내 꼬박꼬박 민석이 편지를 보내오길래 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을까,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부러움이 치미는 매니저였다. 하지만 지금, 루한이 펼쳐놓은 덕에 우연히 엿본 편지지들이 예상처럼 빽빽하긴커녕 텅텅 비어 있어 그는 내심 유쾌했다. 매니저가 그러건 말건 루한은 스케줄 통보를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담담히 있다가 매니저가 방문을 닫고 나가기 전 결정타를 날렸다.


“매니저 형, 저 살맛나는 거 같아요.”

“이 자식 뭐라는.......”


말을 마치기 전, 매니저는 안타깝게도 루한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채버렸다. 얼마 전, 그는 루한에게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참 살맛날 거라고 주정했었다. 루한과 민석이 부러워서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을 당하다니.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매니저가 오열을 하며 방을 나가니 루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매니저가 웃기기도 했지만, 민석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게 온 마음으로 느껴져서.

다음 날, 이른 아침과 저녁에 잡힌 스케줄에 루한은 새벽부터 밖에 나가 있었지만 집에 돌아와 민석의 편지를 보는 걸 빼먹지 않았다.


[나 취하면 공주님 안기 해서 방까지 데려다주고 재워주잖아.]


공주님 안기 정도야, 더 많이 해주고 싶고 해줄 수 있는데, 민석은 남자끼리 무슨 공주님 안기냐며 그리고 자기 무겁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래서 민석이 술에 취해 거동도 못할 때가 루한에겐 유일한 기회였는데 문제는 민석이 루한보다 주량이 세서 먼저 취하는 일도 거의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 편지로 고백할 줄이야. 루한은 지금 당장 민석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밤이 늦어서, 메신저로 토끼가 작은 공룡을 꼭 껴안고 있는 이모티콘만 보내고 저도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왠지 민석이 꿈을 꿀 것 같아. 행복한 예감에 루한의 입이 은은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역시 편지가 왔다.


[하지만 내가 널 좋아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이유는,

루한 너라서.]


루한은 짧고도 길었던 편지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에 민석이 보냈던 편지들을 가득 안고 급하게 집을 나섰다.


“형, 저 차 좀 빌릴게요!”


어디가냐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루한은 계단을 두 세 걸음씩 뛰어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으니까. 민석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편지를 쓰는 네 모습은 어땠을까. 설계도면을 볼 때처럼 입을 모은 채로 꾹 다물고 미간엔 살짝 힘이 들어가 있는 진지한 모습이었을까. 그것부터 시작해 민석의 여러 모습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 루한이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크게 뜨고 엄지를 치켜세울 때,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잘 자라고 인사해줄 때, 몸에 열이 많아 땀을 흘리며 손부채질을 할 때, 볼을 빵빵하게 부풀릴 때, 루한의 몸 상태를 시시각각 알아채고 챙겨줄 때, 그리고 저번처럼 품에 안겨 있다가 갑작스런 고백을 던질 때. 루한은 그럴 때마다 민석이 좋다. 그리고 그를 좋아하는, 사랑하는 이유가 늘어간다. 액셀을 밟는 루한의 발에 기분 좋게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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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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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e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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