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유쫑
깊은 밤. 백현은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종대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지만 식구들을 소집하고선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있었다. 무표정일 때도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종대가 얼른 입을 떼지 않자 몇몇은 틀어져 있는 TV로 눈을 돌렸다. 종대는 입술이 안 보이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가 뗐다. 이제, 진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굿 뉴스랑 배드 뉴스가 있어요. 어떤 거부터 들을래요?”
“둘 다 안 들을래.”
어렵게 말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현이 단칼에 거절했다. 게다가 평소 장난을 칠 때처럼 장난기 섞인 눈웃음으로 종대를 흘끗 쳐다보지도 않고 뚱한 목소리로. 종대도 평소 같았으면 나한테 왜 그러냐고 징징거리며 먼저 장난을 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나마 루한이 굿 뉴스라고 답해주었고 준면이 어서 말해보라며 맞장구를 쳤다.
“나……, 결혼해요.”
TV로 눈을 돌렸던 식구들까지 다시 종대를 쳐다보더니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축하한다, 언제 하냐 등의 말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종대에게 던져지는 중 유일하게 종대를 보고 있지 않은 백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여길 나가겠지. 그게 배드 뉴스고. 뭐, 별로 배드 뉴스도 아닌데.”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세훈과 타오, 찬열이 진짜냐고 물었다. 종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는데 그 전에, 물어본 사람들도 듣고만 있는 사람들도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그게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숙연해진 분위기에 다들 멍하게 허공만 바라보았다. 종대는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백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걸어가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타오가 찬열에게 왜 저러냐고 입모양으로 물었지만 찬열도 영문을 몰라 동그란 눈으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어쨌든 수습은 해야 될 거 같아 준면은 축하한다는 말을 다시 전하고 송별회 날짜를 잡았다. 미간을 좁힌 채 계단을 바라보고 있던 종대도 준면이 일을 추진하자 일단 거기에 집중했다.
백현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끈질기게 못된 짓을 해댔다. 화장실이나 계단에서 마주쳤다하면 종대를 피해 뒷걸음질 쳤고, 1층 거실에 식구들이 모여 있을 때면 이제 한 사람 줄면 더 넓어지겠다고 일부러 종대 들으라는 듯이 막말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찬열이 너 떠나서 서운해서 그렇다고 해명했지만 수모를 받는 입장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떠나기 전 날, 종대는 삭이던 화를 터뜨렸다. 2층으로 올라간 백현을 따라 쿵쿵쿵 계단을 올랐고 백현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찬열이 뒤따라오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그럴 때마다 힘차게 손을 뿌리쳤다.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내가 너한테 꺼지라고 했냐? 내가 간다고, 내가. 근데 왜 네가 성질이냐?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그냥 씹잖아.”
몸이 드나들 수 있을 간격만큼 문을 조금만 연 백현은 턱을 아래로 당겨 종대를 향해 눈을 치떴다. 아래로 쳐진 눈꺼풀 아래에 달린 눈동자가 매서웠다.
“그냥 신경 꺼. 어차피 떠날 건데 일일이 신경 쓰면 너만 스트레스잖아.”
기가 막혀 ‘뭐?’라는 짧은 한 마디가 튀어나오는 찰나의 순간, 백현은 방문을 닫아 버렸다. 닫힌 방문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 화난다고 감정 하나 못 다스리고 남의 방 벌컥벌컥 여는 건 뭐냐는. 계단 근처에 멀찍이 떨어져 이 광경을 지켜보던 찬열이 조심조심 종대에게 다가왔다.
“괜찮냐.”
찬열이 낮게 속삭이며 종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종대는 홧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이틀 후면 정말 떠나는데,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잘 지내주던 백현이 왜 저러는 것일까. 종대는 찬열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앞머리가 휘날리도록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약속 시간은 밤 열한 시. 어젯밤 백현과의 일 때문에 종대는 짐을 싸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카페 문 앞에 서서 한참이나 마음을 추슬렀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1년 동안 기다려온 날이니까 실수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카페는 종대의 생일에도 왔던 그곳이었다. 벌써 수십 번도 더 만졌던 손잡이고 수십 번도 더 왔던 곳이었지만 종대는 이 손잡이를 당기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갈 것처럼 떨렸다. 잘 할 수 있다, 잘 할 수 있어. 종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카페는 영업시간이 아닌 것처럼 휑했다. 깜깜하지 않을 정도로만 불이 켜져 있었고 카운터도 비어 있었다. 종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석 쪽으로 걸어가니 벽 안쪽의 틈에서만 환한 조명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종대는 무거웠던 마음도 잊고 입꼬리를 올리며 커다란 액자 아래 자리로 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종대가 온 걸 알고 있던 크리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종대를 보고 씩 웃으며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렸다.
“잘 지냈어요?”
종대가 의자를 빼내 앉으며 물었다. 크리스의 생일에 만났었으니 두 달 만의 만남이자 해가 바뀌고는 처음인 만남이다. 새해 첫날, 통화로 식구들까지 합세해 새해 인사를 했었지만 둘은 다시 한 번 늦은 인사를 건넸다. 크리스는 커피를 내려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커피라곤 내려 본 적이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커피 머신 만지는 소리가 구석 자리에 들려왔다. 크리스는 곧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잔을 갖고 돌아왔다.
“커피 내리는 건 언제 배웠대요? 오, 냄새 좋다.”
크리스는 우습다는 듯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늘, 사장님 가시기 전에 배웠어.”
“아 맞다. 그럼 여기 지금 통째로 빌린 거예요?”
“으흠. 그렇지. 멋이지?”
크리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커피도 진짜 맛있다고 자화자찬을 해댔다. ‘그 날’로부터 1년이 흘렀다. 변함없는 크리스의 모습에 종대도 피시시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이런 날, 둘만 있는 것도 좋았지만 칭찬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미쳤어 정말. 한참 아껴야 할 때에 그렇게 막 쓰면 어떡해요.”
“왜?”
크리스는 종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동자와 콧구멍을 모두 넓히며 묻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종대는 그 표정이 너무 웃겨 크게 웃음을 터뜨리곤 정색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왜긴요. 흠흠, 내가 오늘 그 반지 받을 거니까.”
시간은 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오늘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머그잔 두 잔을 사이에 놓고 있었다. 머그잔엔 사장이 내린 커피가 들어 있었고 다른 손님도 조금 있었다는 게 오늘과 달랐지만, 벽으로 경계 진 구석자리엔 크리스와 종대 둘뿐이었다는 점은 또 같았다. 둘은 보통의 데이트 때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떠들고 웃고 있었다. 크리스는 그 분위기 그대로,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크리스가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바람에 종대는 하마터면 네, 라고 답할 뻔 했다. 다행히 그 전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종대의 웃는 얼굴이 조금씩 굳으니 크리스는 겉옷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종대에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작은 상자는 크리스의 큰 손 위에서 움직이니 장난감처럼 보였다. 또 뜬금없는 상황도 그러했고 말이다.
“나랑 결혼해줘, 종대.”
종대는 아직도 장난감 같기만 한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려 크리스를 마주보았다. 놀라서 웃음기가 사라진 자신만큼 크리스의 얼굴빛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이 형이 외국인이라 결혼이란 뜻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종대는 속으로만 살짝 의심했다. 크리스는 종대의 얼굴이 닳아 없어질 듯 눈에 힘을 주고 종대를 보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얼른 답해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뭐라고 답해야 할까. 크리스의 뻗은 팔이 아프도록 답을 고민하던 종대의 머릿속에 괜찮은 말이 떠올랐다.
“내 답은,”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1년 후에 할게요.”
“뭐어?”
맥 빠진 크리스가 반지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리고 팔을 거뒀다. 바로 받아주진 않더라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겠지 1년을 기다리라고 말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종대는 크리스의 깊이 좌절한 모습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직 더 재밌는 제안이 남아 있었으니까.
“우리, 1년만 떨어져 살아볼래요?”
두 손으로 앞머리를 넘긴 채 쥐어뜯던 크리스가 동그래진 눈으로 종대를 보았다. 기가 막힌지 살짝 벌어진 입을 한쪽으로 들어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까지 장난을 쳐볼까. 포커페이스가 점점 힘들어지는 종대는 나름대로 행복한 고민을 했다.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이 남은 종대에겐 그 남은 날을 크리스와 함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프로포즈를 한 크리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래서 둘 다 확신을 가질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떨어져 살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번뜩인 것이다. 떨어져 살아보고 나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땐 결혼이란 걸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종대, 진심이야?”
입을 다물고 잠깐 고민하던 크리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종대는 이제 포커페이스가 아니라 웃음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웃음을 참기 위해 꾹 다문 입술이 진지하게 보이도록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크리스는 큰 손으로 하관을 감싸 쥐었다가 쥐어뜯어 헝클어져 있던 금발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큰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 좋아.”
웃음을 멎게 하려고 커피를 마시던 종대는 사레에 들릴 뻔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사랑도 짙어지겠지. 떨어져 살아보고, 정말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때 받아줘.”
좋아, 그렇게 하자, 좋은 것 같다. 크리스는 자기를 납득시키려는 듯 계속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보자.’하는 확고한 청유형도 아니고 ‘살아볼래요?’라는 조심스런 제안이었는데 저토록 괜찮아 하는 건 무어란 말인가. 지나치게 진지한 크리스에 종대는 좀 서운해졌다. 진심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장난도 조금 섞인 제안이었다. 종대는 오히려 오기가 생겨 고집스럽게 그러자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형도 진심이에요?”
“난 항상 진심이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려고 한 말에 크리스는 웃음기를 쏙 빼고 바보 같은 표정도 짓지 않고 종대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 후로 둘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비단 카페 안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동거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러브하우스 같던 집에서도, 몸이 떨어져 있을 때 주고받던 메신저에서도.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크리스의 출장 날도 예정대로 다가왔다. 캐릭터 디자이너가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은지 한 달이 넘는 긴 출장이었다. 종대는 배웅해주는 입장에서 공항까지 운전도 대신 해줬고, 보는 눈이 있는 공항에선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그 흔한 작별 키스도 할 수가 없어 차에서 내리기 전에 끝내 버리고, 출국장으로 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까지 지켜봐주었다. 고작 일주일 전만 해도 형 없으면 어떡하냐고 징징대고 공항에서 울지도 모른다고 수도 없이 경고했었다. 하지만 그를 보내고 나서도 울지 않는 자신에 사랑이 정말 식은 건가, 하고 의심했다. 밥은 잘 챙겨 먹어야 되는데. 그리 걱정하고 있는 자신은 보지 못한 채.
2년 넘게 사귀며 각자 사정으로 혹은 싸워서 며칠, 몇 주씩 만나지 않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7주라는 거의 두 달이나 다름없는 기간 동안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메신저 내용이 조금씩 길어지긴 했지만 3주차까지는 여태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4주차에 접어들며 종대는 크리스의 빈자리가 점점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칫솔 거치대에 나란히 꽂혀있던 칫솔 두 자루가 한 자루가 된 것, 밥을 먹을 때 식탁 앞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 신발장이 널널해진 것. 소파에 앉을 때 크리스가 베고 눕던 제 허벅지가 가벼워진 것. 그 모든 게 쓸쓸해서 견딜 수 없었다. 크리스의 옷장은 건드려 본 적도 거의 없는데 괜히 열어보고 텅 빈 걸 확인하는 괴로움도 사서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보내는 이의 주소가 한자로 적힌 국제 우편이 도착했다. 한자는 읽을 줄 모를뿐더러 주소 아래 바로 적혀 있는 이름이 낯익어 종대의 눈에 단번에 들어왔다. 매일 메신저를 주고받고, 어느 새 자존심 같은 건 다 잊고 얼른 보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종대는 편지를 보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요동치는 심장과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고, 편지를 다 읽고 나선 그 종이 한 장을 가슴에 품고 한참을 있었다. 편지지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보낸 날짜는 크리스가 떠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을 때였다. 자존심 때문이든 고집 때문이든, 말도 안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렇게 외면하려고도 했지만 실은 서로를 이토록 그리워했던 걸. 종대는 그제야 깨달았다.
크리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땐 다른 사람들이 보든 말든 둘은 입국장에서 서로를 아주 꼬옥 끌어안았고 서로의 어깨에 눈물도 조금 묻혔다. 그것이 결국엔 통한다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심을 알고 나서도 1년 동안 떨어져 있기란 약속은 물러지지 않았다. 둘 다 한 번 말한 건 지키는 고집쟁이였고 또 웃자고 던진 말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나쁠 건 없는 제안이기도 했던 것이다. 1년을 잘 버텨내기만 한다면 앞으로 둘이 같이 할 시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백 번 양보해, 크리스가 장기 출장을 갔던 기간을 그 1년에서 빼서 청혼을 했던 1월 19일까지로 기간을 줄이기만 했다.
종대는 원래 계획대로 4월 초에 이사를 가기로 했다. 그 전까지는 세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처럼 서로의 옆을 지키고 싶었으나 이번엔 지방에서 크리스를 불렀다. 다행히 한국 내에서의 출장이라 기간은 2박 3일이었는데 크리스는 마지막 날 자고 오지 않고 새벽길을 달려 종대에게 왔다. 덕분에 이사 전전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자야 했다. 종대는 자지 말고 놀자고 보채지 않았다. 크리스의 옆에 누워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곡을 쓰다가, 잠결이라 한껏 가라앉아 더욱 낮아진 목소리의 크리스와 짧은 대화를 하다가, 같이 잠들다가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이사 전 날은 특별하진 않지만 남부럽지 않은 데이트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이삿날. 크리스는 셰어하우스 식구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종대를 데려다주었다. 별 거 없는 이삿짐이었지만 실어다주고 날라다 준 크리스는 바로 차에 타지 않고 배웅 나온 종대 옆에서 셰어하우스를 한 번 스윽 훑어보았다.
“이런 남자 소굴에 두고 가려니 발이 안 떨어지네.”
종대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작별인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주말 이른 아침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어 집 앞에서 껴안고 있다가 크리스를 차에 태우면 창문을 내려 뽀뽀를 했다. 그래도 1년 치로는 부족하다 싶어 크리스는 종대를 다시 차에 태워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사실상 일단은 4월부터 종대의 생일이 있는 9월까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반 년 정도였지만-게다가 같은 이유로, 전날엔 야외 데이트는 일찍이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몇 번이나 섹스를 했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로부터 딱 1년 째 되는 오늘.
“종대, 진심이야?”
크리스는 그 때의 물음을 반복했다.
“난 항상 진심이죠.”
종대는 크리스가 그 때 했던 답을 따라했다. 그 때도 지금도 진심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대신 오늘은 진심을 말하는 입이 부드럽게 미소를 걸치고 있었고, 서로를 담은 눈이 따스했다. 그 때, ‘와아아!’하는 남정네들의 두꺼운 함성소리가 비어 있는 줄만 알았던 카페에 가득 찼다. 종대는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다고 하기에도 뭐한,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집에 함께 있던 식구들이었다. 뒤를 돌자마자 이어진 폭죽소리에 종대는 어깨를 파르르 떨며 눈을 꾹 감았다. 결혼 축하합니다! 목소리 한 번 우렁차게 여덟 남자가 축하를 전했다.
“뭐야! 왜 다들 여기 있어?!”
종대가 장미꽃 한 송이씩을 든 식구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백현이 식구들을 헤치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손엔 케이크를 든 채였고 크리스와 종대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며칠 동안 죽일 것처럼 으르렁대더니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싶어 종대는 백현의 동태를 가만히 살피기만 했다.
“어후! 내가 아주 같잖은 연기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그래도 표정 보니까 진짜 놀란 것 같긴 하네.”
함을 메고 있던 찬열이 오징어 가면을 머리 위로 올리며 백현 곁으로 다가왔고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건인 즉, 종대가 떠난다고 말하기 전 날 밤, 백현은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작년 여름에 백현과 통화를 하고 나서 그 번호를 지우지 않았고, 백현은 저장해두지 않은 것이었다. 크리스가 저와 종대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해 백현은 종대가 식구들을 소집하기 전부터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대가 떠난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지만 말릴 마음은 없었다. 어찌됐든 좋은 일로 떠나는 거였으니까. 그럼에도 일부러 시비를 걸었던 건 더욱 더 그럴 듯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위한 밑밥인 겸 덤이었다.
식구들은 어젯밤 백현이 종대를 빼고 새로 만든 메신저 단체채팅방을 통해 이 사건을 깨닫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전달받았다. 종대보다 먼저 이 카페에 와서 잠복해 있는 것이었다. 연인인 찬열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찬열이 종대한테 왜 그러냐고 물으면 백현은 다 뜻이 있어서라고만 답했었다. 이유를 알게 된 찬열은 왜 먼저 안 알려줬냐고 마음 상해하긴커녕 빨리 ‘함 사시오’ 준비를 해야 한다며 말도 못할 정도로 바빠졌다.
백현은 그 모든 해프닝을 속 시원히 밝혔다. 종대는 그러는 게 어딨냐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찡찡거렸다. 속상했던 마음은 깨끗하게 녹아 있었다. 구석 자리에 있는 다른 테이블의 의자를 모두 끌어와 앉은 식구들은 깜짝 이벤트 성공에 자화자찬의 뜻으로 박수를 쳤다. 종대가 계속 찡찡거리며 백현의 팔과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자 찬열이 종대에게 어깨동무하는 걸로 저지했다. 백현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다가 찬열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함을 들고 크리스 앞에 내밀었다.
“크리스 형, 이번 일 꼭 갚으셔야 됩니다.”
“아, 근데 타이밍을 잘못 맞췄어. 종대가 반지 끼고 나서였어야 됐는데.”
크리스가 함의 입구를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 말에 식구들은 모두 준면을 돌아보았다. 카운터 뒤에 쪼그리고 앉아 크리스와 종대의 대화를 엿듣다가 카운터 안쪽의 부엌에 있는 식구들에게 출동이라고 손짓한 건 준면이었기 때문이다.
“아 형 제발 좀!”
찬열이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히며 짜증을 내자 식구들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역시 준면이 형이 잘하는 건 소설 쓰기와 애들 챙기기밖에 없다면서. 셰어하우스 식구들은 비글 삼총사를 빼곤 크리스와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대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도 많이 전해 들어서인지 별로 어색한 기운 없이 떠들 수 있었다. 케이크라는 먹거리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종대가 집을 나갔어도 셰어하우스의 시끌벅적한 나날은 계속되었다. 처음 며칠은 종대의 빈자리를 느끼며 허전해 했으나, 경수가 나가고 이씽이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달 동안 그 빈자리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집을 나간 식구들의 빈자리를 문득문득 느끼는 적도 꽤나 있었다.
종대와 크리스의 결혼식 당일도 시끌벅적 정신사납긴 마찬가지였다. 찬열아 나 넥타이 좀! 어 여기여기여기. 야야야, 빨리빨리 와라 조옴! 준마허 나 쿠두 머 시너? 형 양말은? 나 원래 안 신잖아. 우리 시동 걸어놨는데, 언제 나와? 정장을 쫙 빼입은 여덟 남자가 나간 집은 개판 오 분 전, 아니 개판 그 자체였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잘 지냈어요? 다 멋있게 하고 왔네.”
거의 다 왔다는 전화에 식장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종대와 크리스가 식구들을 반겼다.
“어때, 너보다 더 멋있지 않냐.”
“맞치! 인정하라쿠, 쵼대.”
“아냐. 우리가 제일 멋이지.”
백현이 어깨를 털며 자랑하고 타오가 맞장구를 치니 크리스가 진지하게 정색을 했다. 그럼 찬열이 저음의 목소리로 ‘형, 우리 백현이한테 왜 그러세요?’라며 크리스를 슬쩍 밀었고 크리스는 퍽 뒤로 밀려나는 헐리우드 액션을 선보여 식구들을 웃겼다.
결혼식장은 조촐했다. 작은 공간에 걸맞게 하객도 적었다. 종대의 부모님과 형, 캐나다에서 날아오신 크리스의 어머니, 두 신랑의 사정을 알고 있는 열댓 명의 친구들, 주례 선생님, 그리고 셰어하우스의 식구들. 종대는 하얀색 바지에 민트색 재킷으로 산뜻한 봄 신랑의 분위기를 냈고, 크리스는 흰색에 가까운 라이트골드색 스트라이프 턱시도를 빼입어 기다란 키를 돋보이게 했다.
하객이 워낙 없어 모르는 사이여도 다들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루한이 민석에게 속삭였다.
“민석. 우리도 아는 사람 몇 명 초대해서 식 다시 올리자.”
“진짜?”
“응. 우리 둘이만 한 건 좀…… 쓸쓸했어.”
루한은 쓸쓸했다고 말하는 순간 줄곧 민석을 향해 있던 시선을 처음으로 떨어뜨렸다. 그게 정말로 쓸쓸해 보였다, 고 민석은 느꼈다. 민석은 루한을 따라 시선을 떨궜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루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를 불렀다.
“좋아. 하고 싶다, 나도.”
꽃이 피듯 루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오늘은 종대와 크리스의 결혼식이지만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인 냥 둘은 꼬옥 끌어안았다.
식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지만 종대는 식장 관계자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오기로 한 사람 중 한 명이 아직 안 온 것이었다. 전화를 해봐도 먹통이었다. 결국 10분 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는 크리스의 말에 식이 시작되었다.
결혼행진곡이 울리면 종대가 크리스의 팔에 팔짱을 낀 채 두 신랑이 입장했다.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는 아버지의 팔짱을 낀 채 수줍게 입장하는 여느 결혼식과 달랐지만 지루한 주례사는 똑같이 진행되었다. 주례 선생님은 종대의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종대와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주었었다.
종인은 지루한 주례사에 하품을 참을 수 없었다. 손으로 가려도 쩍쩍 벌어지는 입이 보이는 게 참는 노력은 별로 비치지 않았지만. 그 때 닫혔던 식장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종인이 그걸 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문 쪽을 등지지 않고 앉은 자리 탓이었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종인은 눈이 동그래졌다.
줄곧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탓에 종인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놀랐다. 놀라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경수가 자리에 앉으려고 시선을 먼저 뗀 후야 종인도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눈꺼풀도 아래를 향했지만 눈은 여전히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여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크게 숨을 골라보아도 소용없었다. 결혼식이나 보려고 시선을 돌리다 경수가 앉은 쪽을 보면 그와 눈이 마주쳐서 식에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었다. 맞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아니겠지만, 경수가 자꾸 자신을 흘끗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곤혹이었고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으며 이게 바로 총체적 난국이구나 싶었다.
서로에게 고난과 역경이 닥쳤을 때, 떨어져 살았던 일 년을 기억하며 함께 견뎌낼 것을 맹세합니까. 오늘의 주례사 중 가장 멋지고 가장 알찬 부분이었다.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주례사가 끝났고 양가 부모에게 인사가 이어졌다. 축가 전엔 주례석 뒤쪽으로 스크린이 내려왔고 프로젝터에서 영상 하나가 쏴졌다. 이고 지굼 되눈 고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영상이 시작되었다.
-우웅, 그롬 쉬작할게. 오……, 모라구 하쥐? 형 인사요, 인사. 인사, 그래, 죵대, 안뇽? 크리스 씨도 아뇽하세요. 처움 뵙겠숩니다. 죠는 장이씽이라구 합니다. 노무노무 차카고 뀌여운 죵대와 말만 들어찌만 머싯눈 크리스 씨의 결혼을 진시무로 추카해요. 아푸로 하르오모니? 아니아니 할아버지. 아! 하르아버지 될 때까쥐 두리가 욜쉬미 이뿌게 사눈 고예요. 할 수 이따! 아자아자 파이팅!
영상은 세훈이 겨울방학 때 중국에 놀러가서 이씽을 만나 찍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중간중간엔 발음이나 말을 고쳐주고 낄낄거리는 세훈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씽은 셰어하우스에서 지내던 모습과 변함없는 것이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고향이니 살기 더 편한 게 당연하겠지만 종대는 왠지 안심이 돼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축가가 불렸고 시끄러운 팡파레와 화려한 폭죽이 터지며 두 신랑이 퇴장했다. 그리고 퇴장한 것이 무색하게 포토타임이 이어져 신랑들은 다시 앞으로 불려졌다. 종대는 그 사이에 경수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고 크리스와 서로 소개해주었다. 물론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워낙 목청 좋은 종대라 늦게 온 주인공이 경수란 건 몇 안 되는 하객들 모두에게 밝혀지고 말았다. 신랑들이 먼저 부모님들과 사진을 찍는 사이, 종대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둘 경수 근처로 모여든 셰어하우스 식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수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들은 결국 사진사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말을 들었고 식장 밖으로 나가 떠들려고 했다. 그런데 경수는 나가자는 준면을 괜찮다며 손으로 말렸다. 그리고 앉아 있던 자리 근처에 서서 어물쩍거리고 있는 종인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준면과 민석, 루한은 숨을 죽이고 경수의 작은 뒷모습을 흘끗거렸다. 다른 식구들의 눈치가 몰래몰래 본 것이지만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백현과 그를 거드는 찬열 때문에 그들은 이미 다른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보통 사람의 시야는 160도라고 했다. 굳이 경수와, 그와 함께 있는 식구들 쪽을 보지 않아도 종인은 경수가 자신에게 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설마 올까, 오는 걸까, 오는 게 맞나 싶었다. 하지만 외면해도 꿋꿋이 걸어오는 그에 설마가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일부러 몸을 더 돌려 경수가 아예 보이지 않도록 돌아섰지만 이윽고 작은 떨림이 자신의 어깨 뒤쪽을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종인은 짐짓 모르는 척하며 뒤를 돌았고 놀라지 않은 척 했다. 가슴은 이곳에 들어온 경수를 봤을 때처럼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지만.
경수는 일단 종인을 건드리긴 했는데 말을 걸진 못했다. 안녕, 잘 지냈어, 그런 가볍고 형식적인 인사조차 우린 하기 어려워졌다. 말 못하는 자신을 느끼며 경수는 생각했다. 그래도 친구, 지인과 사진 찍는 시간이 가까워져서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어젯밤부터,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만날 생각에 잠자리를 뒤척였으니까. 어떤 옷이 멋있어 보일까 고민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식에도 늦어버렸고 이곳에, 이 아이 앞에 오는 내내 가슴이 쿵쾅거렸으니까, 그 시간들에 보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내서.
“안녕.”
비록 용기를 갖고 한 말도 별 볼일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종인은 입을 열지 않고 경수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고개만 까딱거렸다. 잘 지냈냐고 혹은 어떻게 지냈냐고 혹은 건강하냐고 물어야 할까. 하지만 몇 달 전의 자신 때문에 그러지 못했을 게 너무 뻔해 경수는 눈을 굴리며 다음 말을 고민했다. 종인은 그런 경수를 흘끗 보다가 눈이 마주칠 새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어……, 나는……,”
경수는 땀이 나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피었다. 그리고 종인의 앞에 내밀었다.
“난……, 도경수라고 해.”
종인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제 앞에 내밀어진 희고 작은 손을 멀뚱멀뚱 내려다보았다. 당황해서 아무 생각 없이 경수와 눈을 마주쳐버렸다. 그러면 경수는 이상하게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난 너 알거든.”
김종인. 경수는 아이의 이름 하나 말하는 것도 버겁고 미안해서 그 이름 석 자는 가슴으로만 불렀다. 경수가 종인의 눈빛에 자신을 얻어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했으나 종인은 그 웃음을 보자마자 다시 눈을 피했다. 이곳에서 경수를 보고 심장이 계속 전하던 무거운 고동과는 다른 떨림이 가슴을 때렸다. 그게 무엇인지 종인은 정확히 설명할 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경수에게 상처받고 나서도 그와 나눴던 추억을 떠올리고, 지난겨울 클럽에서 그의 뒷모습을 봤을 때도 지금과 같은 떨림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자신은 아직도 그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어요.”
종인은 경수 앞에서 처음으로 말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수는 제 눈앞에서 툴툴거리듯 종인의 두꺼운 입술이 움직여진 게 고마웠다.
“근데 왜 아는 척 안 해.”
경수는 말끝을 조금 길게 빼서 부드럽게 말했다. 솔직히 종인은 지금 경수가 왜 이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다시 이야기하고 다시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어도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자기 마음 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고 수도 없이 바랐었다. 그것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순간의 자기기만일 뿐임을 알고 있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꿈꾸던 순간이 현실이 되었다. 꿈이 길고 길었었기에 종인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마디라도 하면 깨어질 꿈같아서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다음, 친구 지인 분들 찍겠습니다.”
사진사가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경수와 종인도 가야했다. 종인은 이 말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답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꿈을 벗어나고 싶었다.
“싫어할까봐.”
종인이 바로 뒤를 도는 바람에 그의 말은 경수에게가 아니라 허공으로 흩어졌다. 종인은 도망치려고 했다. 이 사람에게서, 이 달콤쌉싸름한 꿈에서 영원히. 경수는 한 발 짝 더 멀어지면 종인을 영원히 놓칠 것 같았다. 그래 종인의 팔목을 망설임 없이, 아무렇게나 잡아 세웠다. 뒤를 도는 종인의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이제 안 그래.”
종인은 커다래진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경수는 누가 눈꼬리를 잡아 내리는 것처럼 눈 끝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내가 미안해.”
종인의 눈동자가 가감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까닭 모를 경수의 커다란 눈이 슬퍼 보이는 게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힘들어야 할 건 난데 왜 이 사람이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게 꿈이 아니라면, 꿈이라고 해도, 이 사람은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걸까.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왜, 왜. 종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셀 수 없이 많은 꿈을 꿨다. 필히, 그 중 하나에서 이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 꿈을 또 꾸고 있는 건 아닌 걸까. 종인은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종인을 꿈속에서 건지듯, 그의 팔목을 세게 낚아챈 작은 손이 실은 떨리고 있는 것만이 점차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김종인, 도경수! 얼른 와라아!”
종대는 경수가 종인 앞에 섰을 때부터, 카메라 셔터를 볼 때를 빼곤 그 둘을 계속 흘끔거리고 있었다. 청첩장 때문에 만났을 때, 경수는 종인과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종대에게 내비쳤었다. 좋아한다. 그 순정의 고백이 존재하는 사이에서 잘 지내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종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만들어 나갈 차례였다. 그래서 종인과 식구들에게 경수가 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경수의 뜻도 종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는 거라곤 종인을 올려다보는 경수의 얼굴뿐이었지만 그 입마저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종대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대로 좀 더 두고 싶었는데 사정 상 그럴 수가 없어 둘을 불렀다. 씩씩한 목소리는 조금 흥분한 듯했다.
“어, 미안.”
경수는 종대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종인을 잠깐 바라보다가 잡았던 손목을 그대로 끌고 앞으로 나왔다. 종대는 크리스의 팔을 콕콕 찌르고 손바닥을 입 옆에 붙인 채 크리스의 얼굴을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크리스는 경수와 종인 쪽을 계속 곁눈질 하던 종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살짝 미소 지은 종대가 어떤 말을 할지 대충 감을 잡은 참이었다. 종대의 키에 맞춰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종대에게 가까이 대면 종대가 숨소리부터 즐거운 듯이 속삭였다.
“괜찮게 된 거 같죠.”
크리스는 대답 대신 종대와 눈을 맞췄다. 서로의 입가와 눈가에 핀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둘은 정확히 파악했다. 크리스는 종대의 입에 아주 살짝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멋이다, 우리 종대.”
짧은 순간이었지만 둘의 뽀뽀를 본 셰어하우스 식구들은 이따 실컷 하라며 야유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하나 같이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사진사는 좀 더 자연스러운 포즈로 붙으라고 권유했다. 찬열은 백현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준면과 세훈, 타오는 본인들의 표정이 얼마나 웃긴지는 모르고 최대한 밝게 웃었다. 루한은 더 이상 다가갈 틈이 없던 민석 옆으로 더 가까이 붙었고 민석은 그런 루한에게 먼저 손깍지를 꼈다. 경수는 제 손에 잡혔던 종인의 정장 소매의 질감을 느끼며 손을 만지작거렸고, 종인은 멍하니 있다가 얼굴 까만 사람 좀 웃으라는 사진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보았다. 그리고 맨 가운데의 종대와 크리스. 팔짱을 껴 따뜻해진 팔만큼 따뜻하게, 종대는 크리스를 올려다보고 크리스는 종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찍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둘은 서로에게 붙어 있던 시선을 어렵게 떼고 정면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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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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