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유쫑




마지막 이야기 38.안녕, 3월의 신랑들








  깊은 밤. 백현은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종대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지만 식구들을 소집하고선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있었다. 무표정일 때도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종대가 얼른 입을 떼지 않자 몇몇은 틀어져 있는 TV로 눈을 돌렸다. 종대는 입술이 안 보이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가 뗐다. 이제, 진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굿 뉴스랑 배드 뉴스가 있어요. 어떤 거부터 들을래요?”

  “둘 다 안 들을래.”


  어렵게 말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현이 단칼에 거절했다. 게다가 평소 장난을 칠 때처럼 장난기 섞인 눈웃음으로 종대를 흘끗 쳐다보지도 않고 뚱한 목소리로. 종대도 평소 같았으면 나한테 왜 그러냐고 징징거리며 먼저 장난을 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나마 루한이 굿 뉴스라고 답해주었고 준면이 어서 말해보라며 맞장구를 쳤다.


  “나……, 결혼해요.”


  TV로 눈을 돌렸던 식구들까지 다시 종대를 쳐다보더니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축하한다, 언제 하냐 등의 말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종대에게 던져지는 중 유일하게 종대를 보고 있지 않은 백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여길 나가겠지. 그게 배드 뉴스고. 뭐, 별로 배드 뉴스도 아닌데.”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세훈과 타오, 찬열이 진짜냐고 물었다. 종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는데 그 전에, 물어본 사람들도 듣고만 있는 사람들도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그게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숙연해진 분위기에 다들 멍하게 허공만 바라보았다. 종대는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백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걸어가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타오가 찬열에게 왜 저러냐고 입모양으로 물었지만 찬열도 영문을 몰라 동그란 눈으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어쨌든 수습은 해야 될 거 같아 준면은 축하한다는 말을 다시 전하고 송별회 날짜를 잡았다. 미간을 좁힌 채 계단을 바라보고 있던 종대도 준면이 일을 추진하자 일단 거기에 집중했다.




  백현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끈질기게 못된 짓을 해댔다. 화장실이나 계단에서 마주쳤다하면 종대를 피해 뒷걸음질 쳤고, 1층 거실에 식구들이 모여 있을 때면 이제 한 사람 줄면 더 넓어지겠다고 일부러 종대 들으라는 듯이 막말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찬열이 너 떠나서 서운해서 그렇다고 해명했지만 수모를 받는 입장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떠나기 전 날, 종대는 삭이던 화를 터뜨렸다. 2층으로 올라간 백현을 따라 쿵쿵쿵 계단을 올랐고 백현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젖혔다. 찬열이 뒤따라오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그럴 때마다 힘차게 손을 뿌리쳤다.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내가 너한테 꺼지라고 했냐? 내가 간다고, 내가. 근데 왜 네가 성질이냐?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그냥 씹잖아.”


  몸이 드나들 수 있을 간격만큼 문을 조금만 연 백현은 턱을 아래로 당겨 종대를 향해 눈을 치떴다. 아래로 쳐진 눈꺼풀 아래에 달린 눈동자가 매서웠다.


  “그냥 신경 꺼. 어차피 떠날 건데 일일이 신경 쓰면 너만 스트레스잖아.”


  기가 막혀 ‘뭐?’라는 짧은 한 마디가 튀어나오는 찰나의 순간, 백현은 방문을 닫아 버렸다. 닫힌 방문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 화난다고 감정 하나 못 다스리고 남의 방 벌컥벌컥 여는 건 뭐냐는. 계단 근처에 멀찍이 떨어져 이 광경을 지켜보던 찬열이 조심조심 종대에게 다가왔다.


  “괜찮냐.”


  찬열이 낮게 속삭이며 종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종대는 홧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이틀 후면 정말 떠나는데,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잘 지내주던 백현이 왜 저러는 것일까. 종대는 찬열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앞머리가 휘날리도록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약속 시간은 밤 열한 시. 어젯밤 백현과의 일 때문에 종대는 짐을 싸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카페 문 앞에 서서 한참이나 마음을 추슬렀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1년 동안 기다려온 날이니까 실수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카페는 종대의 생일에도 왔던 그곳이었다. 벌써 수십 번도 더 만졌던 손잡이고 수십 번도 더 왔던 곳이었지만 종대는 이 손잡이를 당기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갈 것처럼 떨렸다. 잘 할 수 있다, 잘 할 수 있어. 종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카페는 영업시간이 아닌 것처럼 휑했다. 깜깜하지 않을 정도로만 불이 켜져 있었고 카운터도 비어 있었다. 종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석 쪽으로 걸어가니 벽 안쪽의 틈에서만 환한 조명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종대는 무거웠던 마음도 잊고 입꼬리를 올리며 커다란 액자 아래 자리로 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종대가 온 걸 알고 있던 크리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종대를 보고 씩 웃으며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렸다.


  “잘 지냈어요?”


  종대가 의자를 빼내 앉으며 물었다. 크리스의 생일에 만났었으니 두 달 만의 만남이자 해가 바뀌고는 처음인 만남이다. 새해 첫날, 통화로 식구들까지 합세해 새해 인사를 했었지만 둘은 다시 한 번 늦은 인사를 건넸다. 크리스는 커피를 내려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커피라곤 내려 본 적이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커피 머신 만지는 소리가 구석 자리에 들려왔다. 크리스는 곧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잔을 갖고 돌아왔다.


  “커피 내리는 건 언제 배웠대요? 오, 냄새 좋다.”


  크리스는 우습다는 듯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늘, 사장님 가시기 전에 배웠어.”

  “아 맞다. 그럼 여기 지금 통째로 빌린 거예요?”

  “으흠. 그렇지. 멋이지?”


  크리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커피도 진짜 맛있다고 자화자찬을 해댔다. ‘그 날’로부터 1년이 흘렀다. 변함없는 크리스의 모습에 종대도 피시시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이런 날, 둘만 있는 것도 좋았지만 칭찬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미쳤어 정말. 한참 아껴야 할 때에 그렇게 막 쓰면 어떡해요.”

  “왜?”


  크리스는 종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동자와 콧구멍을 모두 넓히며 묻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종대는 그 표정이 너무 웃겨 크게 웃음을 터뜨리곤 정색을 하며 시치미를 뗐다.


  “왜긴요. 흠흠, 내가 오늘 그 반지 받을 거니까.”


  시간은 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오늘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머그잔 두 잔을 사이에 놓고 있었다. 머그잔엔 사장이 내린 커피가 들어 있었고 다른 손님도 조금 있었다는 게 오늘과 달랐지만, 벽으로 경계 진 구석자리엔 크리스와 종대 둘뿐이었다는 점은 또 같았다. 둘은 보통의 데이트 때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떠들고 웃고 있었다. 크리스는 그 분위기 그대로,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크리스가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바람에 종대는 하마터면 네, 라고 답할 뻔 했다. 다행히 그 전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종대의 웃는 얼굴이 조금씩 굳으니 크리스는 겉옷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종대에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작은 상자는 크리스의 큰 손 위에서 움직이니 장난감처럼 보였다. 또 뜬금없는 상황도 그러했고 말이다.


  “나랑 결혼해줘, 종대.”


  종대는 아직도 장난감 같기만 한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려 크리스를 마주보았다. 놀라서 웃음기가 사라진 자신만큼 크리스의 얼굴빛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이 형이 외국인이라 결혼이란 뜻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종대는 속으로만 살짝 의심했다. 크리스는 종대의 얼굴이 닳아 없어질 듯 눈에 힘을 주고 종대를 보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얼른 답해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뭐라고 답해야 할까. 크리스의 뻗은 팔이 아프도록 답을 고민하던 종대의 머릿속에 괜찮은 말이 떠올랐다.


  “내 답은,”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1년 후에 할게요.”

  “뭐어?”


  맥 빠진 크리스가 반지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리고 팔을 거뒀다. 바로 받아주진 않더라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겠지 1년을 기다리라고 말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종대는 크리스의 깊이 좌절한 모습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직 더 재밌는 제안이 남아 있었으니까.


  “우리, 1년만 떨어져 살아볼래요?”


  두 손으로 앞머리를 넘긴 채 쥐어뜯던 크리스가 동그래진 눈으로 종대를 보았다. 기가 막힌지 살짝 벌어진 입을 한쪽으로 들어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까지 장난을 쳐볼까. 포커페이스가 점점 힘들어지는 종대는 나름대로 행복한 고민을 했다.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이 남은 종대에겐 그 남은 날을 크리스와 함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프로포즈를 한 크리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래서 둘 다 확신을 가질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떨어져 살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번뜩인 것이다. 떨어져 살아보고 나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땐 결혼이란 걸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종대, 진심이야?”


  입을 다물고 잠깐 고민하던 크리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종대는 이제 포커페이스가 아니라 웃음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웃음을 참기 위해 꾹 다문 입술이 진지하게 보이도록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크리스는 큰 손으로 하관을 감싸 쥐었다가 쥐어뜯어 헝클어져 있던 금발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큰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래, 좋아.”


  웃음을 멎게 하려고 커피를 마시던 종대는 사레에 들릴 뻔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사랑도 짙어지겠지. 떨어져 살아보고, 정말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때 받아줘.”


  좋아, 그렇게 하자, 좋은 것 같다. 크리스는 자기를 납득시키려는 듯 계속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보자.’하는 확고한 청유형도 아니고 ‘살아볼래요?’라는 조심스런 제안이었는데 저토록 괜찮아 하는 건 무어란 말인가. 지나치게 진지한 크리스에 종대는 좀 서운해졌다. 진심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장난도 조금 섞인 제안이었다. 종대는 오히려 오기가 생겨 고집스럽게 그러자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형도 진심이에요?”

  “난 항상 진심이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려고 한 말에 크리스는 웃음기를 쏙 빼고 바보 같은 표정도 짓지 않고 종대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 후로 둘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비단 카페 안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동거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러브하우스 같던 집에서도, 몸이 떨어져 있을 때 주고받던 메신저에서도.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크리스의 출장 날도 예정대로 다가왔다. 캐릭터 디자이너가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은지 한 달이 넘는 긴 출장이었다. 종대는 배웅해주는 입장에서 공항까지 운전도 대신 해줬고, 보는 눈이 있는 공항에선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그 흔한 작별 키스도 할 수가 없어 차에서 내리기 전에 끝내 버리고, 출국장으로 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까지 지켜봐주었다. 고작 일주일 전만 해도 형 없으면 어떡하냐고 징징대고 공항에서 울지도 모른다고 수도 없이 경고했었다. 하지만 그를 보내고 나서도 울지 않는 자신에 사랑이 정말 식은 건가, 하고 의심했다. 밥은 잘 챙겨 먹어야 되는데. 그리 걱정하고 있는 자신은 보지 못한 채.

  2년 넘게 사귀며 각자 사정으로 혹은 싸워서 며칠, 몇 주씩 만나지 않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7주라는 거의 두 달이나 다름없는 기간 동안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메신저 내용이 조금씩 길어지긴 했지만 3주차까지는 여태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4주차에 접어들며 종대는 크리스의 빈자리가 점점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칫솔 거치대에 나란히 꽂혀있던 칫솔 두 자루가 한 자루가 된 것, 밥을 먹을 때 식탁 앞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 신발장이 널널해진 것. 소파에 앉을 때 크리스가 베고 눕던 제 허벅지가 가벼워진 것. 그 모든 게 쓸쓸해서 견딜 수 없었다. 크리스의 옷장은 건드려 본 적도 거의 없는데 괜히 열어보고 텅 빈 걸 확인하는 괴로움도 사서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보내는 이의 주소가 한자로 적힌 국제 우편이 도착했다. 한자는 읽을 줄 모를뿐더러 주소 아래 바로 적혀 있는 이름이 낯익어 종대의 눈에 단번에 들어왔다. 매일 메신저를 주고받고, 어느 새 자존심 같은 건 다 잊고 얼른 보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종대는 편지를 보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요동치는 심장과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고, 편지를 다 읽고 나선 그 종이 한 장을 가슴에 품고 한참을 있었다. 편지지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보낸 날짜는 크리스가 떠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을 때였다. 자존심 때문이든 고집 때문이든, 말도 안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렇게 외면하려고도 했지만 실은 서로를 이토록 그리워했던 걸. 종대는 그제야 깨달았다.

  크리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땐 다른 사람들이 보든 말든 둘은 입국장에서 서로를 아주 꼬옥 끌어안았고 서로의 어깨에 눈물도 조금 묻혔다. 그것이 결국엔 통한다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심을 알고 나서도 1년 동안 떨어져 있기란 약속은 물러지지 않았다. 둘 다 한 번 말한 건 지키는 고집쟁이였고 또 웃자고 던진 말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나쁠 건 없는 제안이기도 했던 것이다. 1년을 잘 버텨내기만 한다면 앞으로 둘이 같이 할 시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백 번 양보해, 크리스가 장기 출장을 갔던 기간을 그 1년에서 빼서 청혼을 했던 1월 19일까지로 기간을 줄이기만 했다.

  종대는 원래 계획대로 4월 초에 이사를 가기로 했다. 그 전까지는 세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처럼 서로의 옆을 지키고 싶었으나 이번엔 지방에서 크리스를 불렀다. 다행히 한국 내에서의 출장이라 기간은 2박 3일이었는데 크리스는 마지막 날 자고 오지 않고 새벽길을 달려 종대에게 왔다. 덕분에 이사 전전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자야 했다. 종대는 자지 말고 놀자고 보채지 않았다. 크리스의 옆에 누워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곡을 쓰다가, 잠결이라 한껏 가라앉아 더욱 낮아진 목소리의 크리스와 짧은 대화를 하다가, 같이 잠들다가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이사 전 날은 특별하진 않지만 남부럽지 않은 데이트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이삿날. 크리스는 셰어하우스 식구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종대를 데려다주었다. 별 거 없는 이삿짐이었지만 실어다주고 날라다 준 크리스는 바로 차에 타지 않고 배웅 나온 종대 옆에서 셰어하우스를 한 번 스윽 훑어보았다.


  “이런 남자 소굴에 두고 가려니 발이 안 떨어지네.”


  종대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작별인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주말 이른 아침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어 집 앞에서 껴안고 있다가 크리스를 차에 태우면 창문을 내려 뽀뽀를 했다. 그래도 1년 치로는 부족하다 싶어 크리스는 종대를 다시 차에 태워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사실상 일단은 4월부터 종대의 생일이 있는 9월까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반 년 정도였지만-게다가 같은 이유로, 전날엔 야외 데이트는 일찍이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몇 번이나 섹스를 했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로부터 딱 1년 째 되는 오늘.


  “종대, 진심이야?”


  크리스는 그 때의 물음을 반복했다.


  “난 항상 진심이죠.”


  종대는 크리스가 그 때 했던 답을 따라했다. 그 때도 지금도 진심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대신 오늘은 진심을 말하는 입이 부드럽게 미소를 걸치고 있었고, 서로를 담은 눈이 따스했다. 그 때, ‘와아아!’하는 남정네들의 두꺼운 함성소리가 비어 있는 줄만 알았던 카페에 가득 찼다. 종대는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다고 하기에도 뭐한,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집에 함께 있던 식구들이었다. 뒤를 돌자마자 이어진 폭죽소리에 종대는 어깨를 파르르 떨며 눈을 꾹 감았다. 결혼 축하합니다! 목소리 한 번 우렁차게 여덟 남자가 축하를 전했다.


  “뭐야! 왜 다들 여기 있어?!”


  종대가 장미꽃 한 송이씩을 든 식구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백현이 식구들을 헤치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손엔 케이크를 든 채였고 크리스와 종대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며칠 동안 죽일 것처럼 으르렁대더니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싶어 종대는 백현의 동태를 가만히 살피기만 했다.


  “어후! 내가 아주 같잖은 연기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그래도 표정 보니까 진짜 놀란 것 같긴 하네.”


  함을 메고 있던 찬열이 오징어 가면을 머리 위로 올리며 백현 곁으로 다가왔고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건인 즉, 종대가 떠난다고 말하기 전 날 밤, 백현은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작년 여름에 백현과 통화를 하고 나서 그 번호를 지우지 않았고, 백현은 저장해두지 않은 것이었다. 크리스가 저와 종대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해 백현은 종대가 식구들을 소집하기 전부터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대가 떠난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지만 말릴 마음은 없었다. 어찌됐든 좋은 일로 떠나는 거였으니까. 그럼에도 일부러 시비를 걸었던 건 더욱 더 그럴 듯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위한 밑밥인 겸 덤이었다.

  식구들은 어젯밤 백현이 종대를 빼고 새로 만든 메신저 단체채팅방을 통해 이 사건을 깨닫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전달받았다. 종대보다 먼저 이 카페에 와서 잠복해 있는 것이었다. 연인인 찬열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찬열이 종대한테 왜 그러냐고 물으면 백현은 다 뜻이 있어서라고만 답했었다. 이유를 알게 된 찬열은 왜 먼저 안 알려줬냐고 마음 상해하긴커녕 빨리 ‘함 사시오’ 준비를 해야 한다며 말도 못할 정도로 바빠졌다.

  백현은 그 모든 해프닝을 속 시원히 밝혔다. 종대는 그러는 게 어딨냐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찡찡거렸다. 속상했던 마음은 깨끗하게 녹아 있었다. 구석 자리에 있는 다른 테이블의 의자를 모두 끌어와 앉은 식구들은 깜짝 이벤트 성공에 자화자찬의 뜻으로 박수를 쳤다. 종대가 계속 찡찡거리며 백현의 팔과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자 찬열이 종대에게 어깨동무하는 걸로 저지했다. 백현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다가 찬열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함을 들고 크리스 앞에 내밀었다.


  “크리스 형, 이번 일 꼭 갚으셔야 됩니다.”

  “아, 근데 타이밍을 잘못 맞췄어. 종대가 반지 끼고 나서였어야 됐는데.”


  크리스가 함의 입구를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 말에 식구들은 모두 준면을 돌아보았다. 카운터 뒤에 쪼그리고 앉아 크리스와 종대의 대화를 엿듣다가 카운터 안쪽의 부엌에 있는 식구들에게 출동이라고 손짓한 건 준면이었기 때문이다.


  “아 형 제발 좀!”


  찬열이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히며 짜증을 내자 식구들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역시 준면이 형이 잘하는 건 소설 쓰기와 애들 챙기기밖에 없다면서. 셰어하우스 식구들은 비글 삼총사를 빼곤 크리스와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대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도 많이 전해 들어서인지 별로 어색한 기운 없이 떠들 수 있었다. 케이크라는 먹거리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종대가 집을 나갔어도 셰어하우스의 시끌벅적한 나날은 계속되었다. 처음 며칠은 종대의 빈자리를 느끼며 허전해 했으나, 경수가 나가고 이씽이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달 동안 그 빈자리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집을 나간 식구들의 빈자리를 문득문득 느끼는 적도 꽤나 있었다.  

  종대와 크리스의 결혼식 당일도 시끌벅적 정신사납긴 마찬가지였다. 찬열아 나 넥타이 좀! 어 여기여기여기. 야야야, 빨리빨리 와라 조옴! 준마허 나 쿠두 머 시너? 형 양말은? 나 원래 안 신잖아. 우리 시동 걸어놨는데, 언제 나와? 정장을 쫙 빼입은 여덟 남자가 나간 집은 개판 오 분 전, 아니 개판 그 자체였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잘 지냈어요? 다 멋있게 하고 왔네.”


  거의 다 왔다는 전화에 식장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종대와 크리스가 식구들을 반겼다.


  “어때, 너보다 더 멋있지 않냐.”

  “맞치! 인정하라쿠, 쵼대.”

  “아냐. 우리가 제일 멋이지.”


  백현이 어깨를 털며 자랑하고 타오가 맞장구를 치니 크리스가 진지하게 정색을 했다. 그럼 찬열이 저음의 목소리로 ‘형, 우리 백현이한테 왜 그러세요?’라며 크리스를 슬쩍 밀었고 크리스는 퍽 뒤로 밀려나는 헐리우드 액션을 선보여 식구들을 웃겼다.

  결혼식장은 조촐했다. 작은 공간에 걸맞게 하객도 적었다. 종대의 부모님과 형, 캐나다에서 날아오신 크리스의 어머니, 두 신랑의 사정을 알고 있는 열댓 명의 친구들, 주례 선생님, 그리고 셰어하우스의 식구들. 종대는 하얀색 바지에 민트색 재킷으로 산뜻한 봄 신랑의 분위기를 냈고, 크리스는 흰색에 가까운 라이트골드색 스트라이프 턱시도를 빼입어 기다란 키를 돋보이게 했다.

  하객이 워낙 없어 모르는 사이여도 다들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루한이 민석에게 속삭였다.


  “민석. 우리도 아는 사람 몇 명 초대해서 식 다시 올리자.”

  “진짜?”

  “응. 우리 둘이만 한 건 좀…… 쓸쓸했어.”


  루한은 쓸쓸했다고 말하는 순간 줄곧 민석을 향해 있던 시선을 처음으로 떨어뜨렸다. 그게 정말로 쓸쓸해 보였다, 고 민석은 느꼈다. 민석은 루한을 따라 시선을 떨궜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루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를 불렀다.


  “좋아. 하고 싶다, 나도.”


  꽃이 피듯 루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오늘은 종대와 크리스의 결혼식이지만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인 냥 둘은 꼬옥 끌어안았다.


  식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지만 종대는 식장 관계자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오기로 한 사람 중 한 명이 아직 안 온 것이었다. 전화를 해봐도 먹통이었다. 결국 10분 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는 크리스의 말에 식이 시작되었다.

  결혼행진곡이 울리면 종대가 크리스의 팔에 팔짱을 낀 채 두 신랑이 입장했다.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는 아버지의 팔짱을 낀 채 수줍게 입장하는 여느 결혼식과 달랐지만 지루한 주례사는 똑같이 진행되었다. 주례 선생님은 종대의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종대와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주었었다.

  종인은 지루한 주례사에 하품을 참을 수 없었다. 손으로 가려도 쩍쩍 벌어지는 입이 보이는 게 참는 노력은 별로 비치지 않았지만. 그 때 닫혔던 식장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종인이 그걸 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문 쪽을 등지지 않고 앉은 자리 탓이었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종인은 눈이 동그래졌다.

  줄곧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탓에 종인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놀랐다. 놀라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경수가 자리에 앉으려고 시선을 먼저 뗀 후야 종인도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눈꺼풀도 아래를 향했지만 눈은 여전히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여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크게 숨을 골라보아도 소용없었다. 결혼식이나 보려고 시선을 돌리다 경수가 앉은 쪽을 보면 그와 눈이 마주쳐서 식에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었다. 맞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아니겠지만, 경수가 자꾸 자신을 흘끗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곤혹이었고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으며 이게 바로 총체적 난국이구나 싶었다.

  서로에게 고난과 역경이 닥쳤을 때, 떨어져 살았던 일 년을 기억하며 함께 견뎌낼 것을 맹세합니까. 오늘의 주례사 중 가장 멋지고 가장 알찬 부분이었다.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주례사가 끝났고 양가 부모에게 인사가 이어졌다. 축가 전엔 주례석 뒤쪽으로 스크린이 내려왔고 프로젝터에서 영상 하나가 쏴졌다. 이고 지굼 되눈 고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영상이 시작되었다.


  -우웅, 그롬 쉬작할게. 오……, 모라구 하쥐? 형 인사요, 인사. 인사, 그래, 죵대, 안뇽? 크리스 씨도 아뇽하세요. 처움 뵙겠숩니다. 죠는 장이씽이라구 합니다. 노무노무 차카고 뀌여운 죵대와 말만 들어찌만 머싯눈 크리스 씨의 결혼을 진시무로 추카해요. 아푸로 하르오모니? 아니아니 할아버지. 아! 하르아버지 될 때까쥐 두리가 욜쉬미 이뿌게 사눈 고예요. 할 수 이따! 아자아자 파이팅!


  영상은 세훈이 겨울방학 때 중국에 놀러가서 이씽을 만나 찍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중간중간엔 발음이나 말을 고쳐주고 낄낄거리는 세훈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씽은 셰어하우스에서 지내던 모습과 변함없는 것이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고향이니 살기 더 편한 게 당연하겠지만 종대는 왠지 안심이 돼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축가가 불렸고 시끄러운 팡파레와 화려한 폭죽이 터지며 두 신랑이 퇴장했다. 그리고 퇴장한 것이 무색하게 포토타임이 이어져 신랑들은 다시 앞으로 불려졌다. 종대는 그 사이에 경수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고 크리스와 서로 소개해주었다. 물론 사진 찍고 가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워낙 목청 좋은 종대라 늦게 온 주인공이 경수란 건 몇 안 되는 하객들 모두에게 밝혀지고 말았다. 신랑들이 먼저 부모님들과 사진을 찍는 사이, 종대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둘 경수 근처로 모여든 셰어하우스 식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수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들은 결국 사진사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말을 들었고 식장 밖으로 나가 떠들려고 했다. 그런데 경수는 나가자는 준면을 괜찮다며 손으로 말렸다. 그리고 앉아 있던 자리 근처에 서서 어물쩍거리고 있는 종인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준면과 민석, 루한은 숨을 죽이고 경수의 작은 뒷모습을 흘끗거렸다. 다른 식구들의 눈치가 몰래몰래 본 것이지만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백현과 그를 거드는 찬열 때문에 그들은 이미 다른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보통 사람의 시야는 160도라고 했다. 굳이 경수와, 그와 함께 있는 식구들 쪽을 보지 않아도 종인은 경수가 자신에게 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설마 올까, 오는 걸까, 오는 게 맞나 싶었다. 하지만 외면해도 꿋꿋이 걸어오는 그에 설마가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일부러 몸을 더 돌려 경수가 아예 보이지 않도록 돌아섰지만 이윽고 작은 떨림이 자신의 어깨 뒤쪽을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종인은 짐짓 모르는 척하며 뒤를 돌았고 놀라지 않은 척 했다. 가슴은 이곳에 들어온 경수를 봤을 때처럼 미친 듯이 뛰어대고 있었지만.

  경수는 일단 종인을 건드리긴 했는데 말을 걸진 못했다. 안녕, 잘 지냈어, 그런 가볍고 형식적인 인사조차 우린 하기 어려워졌다. 말 못하는 자신을 느끼며 경수는 생각했다. 그래도 친구, 지인과 사진 찍는 시간이 가까워져서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어젯밤부터,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만날 생각에 잠자리를 뒤척였으니까. 어떤 옷이 멋있어 보일까 고민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식에도 늦어버렸고 이곳에, 이 아이 앞에 오는 내내 가슴이 쿵쾅거렸으니까, 그 시간들에 보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내서.


  “안녕.”


  비록 용기를 갖고 한 말도 별 볼일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종인은 입을 열지 않고 경수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고개만 까딱거렸다. 잘 지냈냐고 혹은 어떻게 지냈냐고 혹은 건강하냐고 물어야 할까. 하지만 몇 달 전의 자신 때문에 그러지 못했을 게 너무 뻔해 경수는 눈을 굴리며 다음 말을 고민했다. 종인은 그런 경수를 흘끗 보다가 눈이 마주칠 새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어……, 나는……,”


  경수는 땀이 나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피었다. 그리고 종인의 앞에 내밀었다.


  “난……, 도경수라고 해.”


  종인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제 앞에 내밀어진 희고 작은 손을 멀뚱멀뚱 내려다보았다. 당황해서 아무 생각 없이 경수와 눈을 마주쳐버렸다. 그러면 경수는 이상하게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난 너 알거든.”


  김종인. 경수는 아이의 이름 하나 말하는 것도 버겁고 미안해서 그 이름 석 자는 가슴으로만 불렀다. 경수가 종인의 눈빛에 자신을 얻어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했으나 종인은 그 웃음을 보자마자 다시 눈을 피했다. 이곳에서 경수를 보고 심장이 계속 전하던 무거운 고동과는 다른 떨림이 가슴을 때렸다. 그게 무엇인지 종인은 정확히 설명할 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경수에게 상처받고 나서도 그와 나눴던 추억을 떠올리고, 지난겨울 클럽에서 그의 뒷모습을 봤을 때도 지금과 같은 떨림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자신은 아직도 그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어요.”


  종인은 경수 앞에서 처음으로 말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수는 제 눈앞에서 툴툴거리듯 종인의 두꺼운 입술이 움직여진 게 고마웠다.


  “근데 왜 아는 척 안 해.”


  경수는 말끝을 조금 길게 빼서 부드럽게 말했다. 솔직히 종인은 지금 경수가 왜 이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다시 이야기하고 다시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어도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자기 마음 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고 수도 없이 바랐었다. 그것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순간의 자기기만일 뿐임을 알고 있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꿈꾸던 순간이 현실이 되었다. 꿈이 길고 길었었기에 종인은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마디라도 하면 깨어질 꿈같아서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다음, 친구 지인 분들 찍겠습니다.”


  사진사가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경수와 종인도 가야했다. 종인은 이 말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답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꿈을 벗어나고 싶었다.


  “싫어할까봐.”


  종인이 바로 뒤를 도는 바람에 그의 말은 경수에게가 아니라 허공으로 흩어졌다. 종인은 도망치려고 했다. 이 사람에게서, 이 달콤쌉싸름한 꿈에서 영원히. 경수는 한 발 짝 더 멀어지면 종인을 영원히 놓칠 것 같았다. 그래 종인의 팔목을 망설임 없이, 아무렇게나 잡아 세웠다. 뒤를 도는 종인의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이제 안 그래.”


  종인은 커다래진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경수는 누가 눈꼬리를 잡아 내리는 것처럼 눈 끝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내가 미안해.”


  종인의 눈동자가 가감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까닭 모를 경수의 커다란 눈이 슬퍼 보이는 게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힘들어야 할 건 난데 왜 이 사람이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게 꿈이 아니라면, 꿈이라고 해도, 이 사람은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걸까.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왜, 왜. 종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셀 수 없이 많은 꿈을 꿨다. 필히, 그 중 하나에서 이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 꿈을 또 꾸고 있는 건 아닌 걸까. 종인은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종인을 꿈속에서 건지듯, 그의 팔목을 세게 낚아챈 작은 손이 실은 떨리고 있는 것만이 점차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김종인, 도경수! 얼른 와라아!”


  종대는 경수가 종인 앞에 섰을 때부터, 카메라 셔터를 볼 때를 빼곤 그 둘을 계속 흘끔거리고 있었다. 청첩장 때문에 만났을 때, 경수는 종인과 예전처럼 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종대에게 내비쳤었다. 좋아한다. 그 순정의 고백이 존재하는 사이에서 잘 지내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종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만들어 나갈 차례였다. 그래서 종인과 식구들에게 경수가 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경수의 뜻도 종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는 거라곤 종인을 올려다보는 경수의 얼굴뿐이었지만 그 입마저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종대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대로 좀 더 두고 싶었는데 사정 상 그럴 수가 없어 둘을 불렀다. 씩씩한 목소리는 조금 흥분한 듯했다.


  “어, 미안.”


  경수는 종대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종인을 잠깐 바라보다가 잡았던 손목을 그대로 끌고 앞으로 나왔다. 종대는 크리스의 팔을 콕콕 찌르고 손바닥을 입 옆에 붙인 채 크리스의 얼굴을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크리스는 경수와 종인 쪽을 계속 곁눈질 하던 종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살짝 미소 지은 종대가 어떤 말을 할지 대충 감을 잡은 참이었다. 종대의 키에 맞춰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종대에게 가까이 대면 종대가 숨소리부터 즐거운 듯이 속삭였다.


  “괜찮게 된 거 같죠.”


  크리스는 대답 대신 종대와 눈을 맞췄다. 서로의 입가와 눈가에 핀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둘은 정확히 파악했다. 크리스는 종대의 입에 아주 살짝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멋이다, 우리 종대.”


  짧은 순간이었지만 둘의 뽀뽀를 본 셰어하우스 식구들은 이따 실컷 하라며 야유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하나 같이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사진사는 좀 더 자연스러운 포즈로 붙으라고 권유했다. 찬열은 백현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준면과 세훈, 타오는 본인들의 표정이 얼마나 웃긴지는 모르고 최대한 밝게 웃었다. 루한은 더 이상 다가갈 틈이 없던 민석 옆으로 더 가까이 붙었고 민석은 그런 루한에게 먼저 손깍지를 꼈다. 경수는 제 손에 잡혔던 종인의 정장 소매의 질감을 느끼며 손을 만지작거렸고, 종인은 멍하니 있다가 얼굴 까만 사람 좀 웃으라는 사진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보았다. 그리고 맨 가운데의 종대와 크리스. 팔짱을 껴 따뜻해진 팔만큼 따뜻하게, 종대는 크리스를 올려다보고 크리스는 종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찍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리면 둘은 서로에게 붙어 있던 시선을 어렵게 떼고 정면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하나, 둘, 셋.










-
140310

Posted by Neese
l



W.유쫑




37.한 번 더








  신간은 어김없이 대박을 터뜨렸다. 인터넷 뉴스며 스포츠 신문, TV뉴스의 신간 소개 코너에서도 김수호의 책이 핫이슈였다.

  종대는 타오가 모르거나 어려워하는 부분을 알려주며 책을 두 번이나 읽었고, 그 때마다 준면에게 진짜 재밌다며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럼 준면은 부끄러우니 하지 말라면서도 뒷목을 매만지며 웃었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백현이 옳다구나 하고 말했다.


  “그럼 형이 한 턱 쏘면 되겠네! 겨울이니까 겨울바다? 스키장? 아님 따뜻하게 제주도?”


  준면은 아직 원고료도 다 못 받았는데 무슨 소리냐며 헛웃었다. 백현은 제가 말을 던져놓고도, 밥도 아니고 여행은 좀 무리인가 싶어 반포기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좋다며 자신을 지지해주는 찬열과 겨울바다가 좋다고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종인에 힘입어 준면을 슬슬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번 소설 얘기도 우리 집 얘기랑 비슷하던데, 그러면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앞으로 쓸 다른 이야기에 소재로 써보는 건 어떻겠냐. 작품을 떠나서 우리끼리 놀러가는 걸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백현의 달콤한 속삭임에 준면은 어느 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며칠 뒤, 준면은 아홉 식구들 앞에 A4용지 뭉치를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이게 뭐냐고 묻는 종대에게 준면은 일단 읽어 보라며 팔짱만 끼고 있었다. 종이뭉치를 집어든 건 종이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민석이었다.


  “스키장? 스키장을 가자고?”


  준면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민석에게서 종이를 뺏어들었다. 찬열은 백현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함께 종이를 살펴보았고,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다 들릴 것처럼 열중해서 내용을 읽었다. 종이에 인쇄된 내용을 믿지 못해 같은 부분을 몇 번씩 반복해 읽는 둘에게 종대가 자기도 좀 보자며 몸을 기댔다.


  “그니까, 지금 우리들, 형까지 아홉 명 입장권을 다 끊은 거예요?”

  “그런 셈이지.”

  “이야! 역시 대작가님! 이래서 형 책이 대박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니까.”


  눈을 튀어나올 듯이 뜬 찬열이 확인 사살을 하자 백현은 환호는 물론 기립박수까지 감행했다. 다른 식구들 역시 대박이라며 입을 모았다. 사실 준면이 비용을 전부 부담하는 건 아니었다. 준면이 부담하는 건 이미 결제가 완료되어 인쇄까지 한 스키장 이용권이었고, 장비 렌탈비는 개인 부담, 숙박비와 렌트카 비용은 n분의 1로 나누었다. 그래도 스키장 이용권 자체가 싸지 않아, 식구들은 준면이 다 차린 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셈이었다.

  여행은 당장 돌아오는 주말이었다. 각각 약속이 있는 식구들도 있었고 세훈과 종인은 춤 연습 일정에 투덜댔다. 그래 준면이 결제는 취소하고 다시 하면 되니까, 돈도 아낄 겸 너희는 가지 말라고 했더니 다들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들어 선약을 모두 취소해 버렸다. 아무렴 이런 기회야 쉽게 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일로 식구들은 다시 한 번 준면의 어마어마한 재력을 피부로 실감했다.










  겨울이니 스키장을 가자고 한 건 백현이었지만 사실 이번이 난생 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가장 최근에 온 것이 종대로 작년에도 크리스와 왔었다고 했으나, 나머지 식구들은 백현처럼 처음 오거나 어렸을 때 와 봤던 게 전부여서 장비를 갖고 한참 씨름을 벌였다. 간신히 장비들을 차고 또 챙겼지만 스키장에 들어갈 때도 입구를 단번에 찾지 못해 헤맸다. 우여곡절 끝에 스키장으로 들어온 식구들은 눈앞에 펼쳐진 설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춍대 벌서 가냐?”


  낮은 곳에서 보드를 타고 몇 번 내려가 보는 걸로 몸을 푼 종대가 리프트 타는 곳으로 가려하니 그걸 발견한 타오가 물었다. 아무리 중국 사람이라도 그렇지 나이 개념이 아예 결여된 것 같은 타오에게 종대는 형 소리 듣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왜 형이라고 안 하냐 따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나도 칼래. 마마, 이따 퐈!”


  스키엔 일가견이 있다면서 굳이 보드를 잡아 쩔쩔매고 있는 준면을 타오는 과감히 버리고 종대에게 폴짝폴짝 뛰어갔다. 준면이 야속해서 엄마 혼자 두고 어디 가냐고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건 같이 있겠다는 타오가 아닌, 자기 자신을 엄마라고 지칭한 남자를 향한 사람들의 의아한 눈초리였다. 준면은 헛기침을 하고 같은 처지의 열등생인 종인과 세훈에게 어기적거리며 다가갔다. 하지만 그 둘마저도 춤 연습으로 단련된 운동 신경 덕에 스키와 보드 실력이 금방 늘어 준면을 버리고 리프트에 올랐다.

  막상 올라오긴 했지만 바로 중급 코스로 올라온 세훈과 종인은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몰라 소녀들처럼 호들갑을 떨며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미 저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종대와 타오를 만났다. 타오가 바보들이라고 놀리면 세훈은 보드를 눈 더미에 꽂아 넣고 달려가 타오에게 헤드락을 걸었고 타오가 반격해 눈 속에서 같이 구르고 했다. 종대와 종인은 그야말로 눈사람이 된 둘의 모습에 폭소했다.


  “형은 작년에도 왔다고 하더니 잘 타긴 한다.”


  결국 세훈과 타오를 버리고 먼저 가기로 한 두 김 형제였다. 종인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종대에 감탄했다.


  “나야 뭐, 우리 형이랑 왔었으니까. 참, 처음 왔을 때는 형이 자기 타는 거 보라고 해서 엄청 잘 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멋있다, 하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려가기 시작하니깐 막 괴성을 지르는 거야. 그래서 결국엔 강사 하나 붙여서 둘이 처음부터 배웠지.”


  분명히 자랑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크리스의 이야기를 하는 종대는 눈꼬리부터 입꼬리까지, 얼굴 세포 하나하나가 웃고 있었다. 종인은 크리스 생각만으로, 그의 이야기만으로 즐거워하는 종대가 신기해 웃음꽃이 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니, 즐거운 것보단 익숙하게 자리 잡은 주름들이 따뜻해 보인달까. 어쨌든 종인에겐 신기한 점이었다. 그 사이에 눈을 털어낸 세훈과 타오가 돌아와서 넷은 결국 다 같이 출발하게 되었다.

  그들은 초급 코스 지점을 넘었을 때 익숙한 인영에 잠시 멈췄다. 조절을 못해 생각보다 좀 더 내려간 세훈은 보드를 벗고 영차영차 셋에게 뛰어갔다. 하지만 위의 세 명은 걸음을 멈추고 두 인영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두 인영은 역시나 백현과 찬열이었다. 맞는데 왜 저러고 있지. 영문 모르는 세훈은 남은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박찬열! 왜 자꾸 글루 가고 그래! 갖다 박을 거야?”


  백현은 넘어진 찬열에게 선 채로 바가지를 긁어댔다.


  “아, 뭐, 누군 여기로 오고 싶어서 오냐! 몸이 가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니까 네 몸 간수는 네가 잘 해야지! 어오 답답이. 그냥 아래에서 타든가! 누가 올라 오쟀어?”

  “난 네가 금방 잘 타니까 지루할까봐 오자고 했지. 하여튼 생각을 해줘도.”

  “누, 누군 뭐 생각 안 했냐? 지 다칠까봐 걱정해줬더니.”


  아주 스키장 창피한 줄 모르고 쌈박질이다. 세훈은 왜 이러고 있냐고 셋에게 묻는 동시에 사태를 깨달아 버렸다.


  “……이런 게 사귀는 사이라고요? 믿을 수가 없다 진짜.”


  타오는 두 형이 어이없으면서도 세훈의 말에 동감해서, 입을 벌린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티격태격도 아니고, 잡아먹을 듯이 싸우다가도 걱정해줬다는 백현의 말에 찬열은 인상을 펴며 반짝반짝한 눈으로 백현을 올려다보았다. 백현은 홧김에 던진 말이 부끄러워 애꿎은 고글만 만지작거렸다.


  “괘, 괜찮으면 됐어. 가자.”


  그리고 여전히 찬열과 눈을 못 마주치고 있자 찬열이 먼저 손, 하고 손을 내민다. 백현은 피식 웃고 혼자 일어나라며 거절했지만 찬열이 포기하지 않자 마지못해 손을 건넸다. 찬열은 백현의 손을 잡고 으쌰 일어섰다.

  고래고래 싸우던 두 친구를 보며 팔짱을 끼고 입을 삐죽이던 종대가 귀여운 해피엔딩에 피식 웃었다. 세훈이 종대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듣고 왜 그러냐 물으면 종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곤


  “이제 좀 믿을 수 있지?”


  라며 세훈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닭살 돋는 게 좋다는 건 아니잖아요. 세훈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인중을 늘려 얄미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서투른 두 연인이 서서히 핑크빛 기류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타오는 눈치 없게 그들에게 달려갔다. 종대가 쯔타오 어디 가냐고 말렸지만 한 번 돌진한 타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준마허는 어디써어!”


  타오가 백현과 찬열에게 큰소리쳤다. 루한이 고소공포증이 있어 리프트를 타지 못하고 민석은 추위를 많이 타 잘 놀지 못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둘은 스키장에 입장한 뒤부터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 식구들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고로 세훈과 종인도 준면을 놓고 온 시점에서 그가 함께 있을 만한 사람은 백현과 찬열뿐인데 이들은 둘이서 떡하니 여기 있으니 준면은 십중팔구 혼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어떠케 엄마를 두코 올 수가 이서! 어마, 조그만 기다려, 타어가 가께!”


  타오는 얼른 보드를 신고 내려가 버렸다. 그러는 자기도 아까 준면이 형 버리고 온 거면서. 종대는 피식 웃고 넘어질 듯 서둘러서 내려가는 타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디를 놀러가든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밤엔 술판이 벌어졌다. 술 게임을 하다가 막내 세훈과 술이 약한 종인이 나가떨어져 방으로 강제 호송되면 적어진 인원으로 분위기가 농익으며 진실 게임이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진실 게임의 타겟은 커플들이었다. 썸을 타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뻔히 밝혀진 사이의 두 커플이었기에 질문의 수위도 꽤나 높았다.

  그러나 질문에 대처하는 두 커플의 자세는 전혀 달랐다. 찬열과 백현 쪽은 평소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수가 줄어들었고 얼굴을 붉히며 대답 대신 술만 퍼마실 뿐이었다. 반면 루한과 민석은 관록 있는 부부답게 막히는 것 없이 술술 말했다. 특히 식구들 앞에서 애정표현 하나 먼저 잘 하지도 않는 민석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당당하게 털어놓는 것이 볼 만 했다. 민석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준면이 좋은 공부를 했다고, 나중에 꼭 자세히 잘 써보겠다고 하니 그 제야 놀리지 말라고 귀를 붉히는 민석이었다.

  술을 계속 들이킨 찬열과 백현은 결국 자의가 아닌 채로 거실바닥에 포개어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타겟은 종대였다. 술병 주둥이에 우연히 걸린 참이었지만 준면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왜 크리스와 떨어져 사는 거냐고 물었다. 준면과 타오, 민석, 루한 모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종대를 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말해야 돼? 말하지 마? 종대는 자신을 향한 네 쌍의 눈을 돌려보며 숨 막히는 갈등을 느꼈다. 술이 센 것이 흑역사를 만들어주진 않지만, 취한 사람 뒤처리를 해야 하거나 이렇게 난감한 질문을 받는 등 일을 불러올 때가 종종 있었다. 바로 그 때, 구세주처럼 크리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식구들이 받지 말거나 여기서 받으라고 야유를 퍼부었지만 종대는 꿋꿋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네, 형!”

  -응, 잘 놀고 있었어? 통화 돼?

  “그러엄. 타이밍 죽였어요.”


  종대는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가며 진실게임을 하다가 난감한 질문을 받았다는 걸 전했다.


  -그래서 말했어?!


  깜짝 놀란 크리스가 버럭 물었다.


  “아 형, 지금 날 뭘로 보고. 당연히 말 안 했죠. 우리 비밀 약속인데.”

  -그…… 렇지? 당연하지. 내가 우리 종대 믿었지.


  크리스가 원래의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면 종대는 지른 지 1분도 안 된 크리스의 사자후를 떠올리며 아닌 것 같다고 놀려댔다. 늦은 밤, 콘도 로비는 조명이 반쯤 꺼져 어둑어둑했다. 넓은 창문밖엔 밤이 되어 더욱 더 새하얗게 빛나는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로비는 야간 스키를 타고 들어오거나 타러 나가는 사람, 그 밖의 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전부라 맘 놓고 통화를 하는 종대가 전세를 낸 것 같았다. 종대는 조금 딱딱하지만 넓은 검은 소파에서 이리 앉았다 저리 앉았다하며 통화를 계속했다. 열이 오르는 핸드폰이 으슬으슬해지는 몸을 데워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랬듯, 로비를 지나가는 인기척에 종대가 별 생각 없이 눈을 돌리면 이번엔 패딩 차림의 종인이 보였다. 종대는 로비가 울릴 정도로 크게 종인을 불렀다.


  “형형, 종인이에요. 네, 짱아 아빠.”


  핸드폰을 들이미는 종대에게 종인은 이러지 말라며 그 손을 밀치다가도 종대가 아예 제 신상을 밝혀버리니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종인은 짱아가 자신을 찾아온 경로를 여전히 모르고 있었지만, 짱아의 안부를 묻는 크리스는 종대에게 들어 알겠거니 했다. 적당히 할 말도 없어 핸드폰을 얼른 종대에게 건네고 종인은 출구로 느리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종대는 앉은 채로 몸을 낮춰 마이크에 대고 속삭였다.


  “형, 나 종인이한테 할 말 있어서. 끊을게요, 미안해요.”

  -뭐 경수 씨 얘기?

  “응.”

  -알았어. 얘기 잘 하고, 얼른 들어가서 자.

  “응, 형두.”


  종대는 통화종료 화면이 뜬 핸드폰을 꼭 쥐고 종인을 부르며 달려갔다. 종인은 영문도 모른 채 종대에게 끌려와 로비 소파에 앉혀졌다.


  “꽐라 돼서 들어가 놓구 어떻게 나왔대.”

  “안 취했었어요.”


  완전히 안 취한 건 아니고 취하긴 했었다. 다만 몸을 못 가눌 정도가 되어 뻗진 않았다. 방에서 종인은 이국적인 밤 풍경을 내려다보며 열두 시가 넘으면 생일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종인이 답했지만 종대는 원래 취한 사람이 취했다고 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종인은, 웃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종인의 얼굴을 보고 있던 종대가 서서히 웃음기를 거두었다. 입을 한쪽으로 모으고 어떻게 말할까 고민했다.


  “너한테는 미안하다.”


  고민 끝에 말했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깨끗한 백지장 같았다. 막무가내로 던진 말이었지만 종인은 종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또 무슨 말을 할지 알아차렸다. 그래 뒷말을 종용하지 않고 종대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씽이 형 마지막 공연 날……, 내가 알려줘서 갔었거든. ……경수.”


  그럼에도 종인과 만날 것이 염려되어 마지막 인사는 종대를 통해서만 한 경수였다.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못 마주치고 있던 종대가 말을 마치며, 자신을 직시하던 종인을 마주보았다. 그런데 종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내리깔았던 시선의 위치가 달라진 것을 빼고 종인은 그대로였다.


  “……알고 있었어?”


  종인은 대답 대신 줄곧 종대를 향해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형이 데려왔나 의심은 했는데, 진짜인 줄은. 종인은 웅얼거리고 말끝을 흐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비록 아무도 없었지만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로비가 침묵에 둘러싸이자 그 고요는 더욱 더 크게 다가왔다. 그와 대비되게, 찬 기운을 머금은 창 너머로 들리는 바람소리며 사람들이 지나가고 떠드는 소리가 두드러졌다. 종대는 또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 뭐가 미안해요. 왜 형이 미안해하고 그러냐.”


  종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구부렸던 허리를 펴서 소파에 깊이 기대앉았다. 어, 아니, 그냥. 종대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속 시원히 뭔가를 말하진 않았다. 한 마디 귀띔도 않고 경수를 데려가서 미안하고, 그걸 끝까지 비밀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 마치 친동생이 실연을 당한 것처럼 종대는 한없이 안타깝기만 했다. 고개를 숙인 종대에게 종인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경수가 너 잘 지내는지 궁금해 하더라. 종대는 그 말은 끝까지 비밀로 묻었다. 경수는 진심으로 종인을 걱정했을지 몰라도 그게 종인에겐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아끼는 동생을 위해서라도 희망고문은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거 알아요?”


  손을 거둔 종인이 슬며시 물었다. 종대가 고개를 들면 종인은 새하얀 설경을 덮고 있는 새까만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늘, 경수 형 생일이다?”


  말끝은 살짝만 올라가 있었다. 열두 시 넘었으니까. 종대가 아무 말 않고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사이, 종인은 그리 덧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대는 앉은 채 허리만 돌려 뒤를 보고 한쪽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어디 가! 늦었잖아.”

  “산책이요. 술도 마저 깨고.”


  패딩에 몸을 파묻은 종인은 뒤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종인이 뜻밖에 몰고 온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혼자 있는 게 크리스와 통화하기 좋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기분을 더 가라앉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어두침침한 로비의 조명도 반짝거려 예쁘다고 생각했던 새하얀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종대는 스키장 곳곳에 흩어졌던 식구들이 숙소에 모여 저녁을 먹을 때부터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요 며칠 다 같이 집에 있을 때도 그랬다. 종인 말대로 열두 시가 넘었으니, 앞으로 딱 일주일. 그 날 크리스와 무슨 결론이 나든 종대는 이 집을 떠날 것이다. 떠난다는 걸 식구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그 한 마디 하는 게 왜 그리 어려운지, 말해야 돼 말해야 돼, 종대의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도통 입 밖으로 튀어나가질 못했다. 식구들과 있을 때면 먹고 마시고 떠들며 웃긴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엔 항상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냐는 걱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단 오늘도, 아니 열두 시가 넘었으니 어제도 말하긴 틀렸고. 내일 집에 가서 말할까. 종대가 마음을 다잡으며 일어서는데 크리스에게 문자가 왔다. 긴 내용도 아닌데 종대는 선 채로 꽤 오랫동안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고 마침내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셰어하우스를 떠나도, 식구들과 함께 한 추억은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지난여름에 놀러갔던 바다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듯이, 오늘의 여행도, 지난 일 년 동안의 일들도. 시간이 많이 흐르면 기억은 바래져서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떨어져 있어도, 추억으로 품은 식구들과 함께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종대와 크리스가 떨어져 살며 그랬던 것과 꼭 같이.

  종대 항상 멋이다 사랑해^^

  핸드폰 화면을 켜지 않아도 크리스가 보낸 문자는 생생한 잔상으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문자를 마음에 담으려는 듯 종대는 핸드폰을 가슴 앞에 대고 있었다.










-

140306

Posted by Neese
l



W.유쫑




36.더 나은 삶을 위하여






  오후 12시 50분. 광화문 광장, 홍대, 이대, 명동, 동대문에서 불시에 길거리 퍼포먼스가 일어났다. 각각의 장소에서 열댓 명 정도의 크루들은 밝은 햇빛 아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렬하게 춤을 췄다. 강한 비트의 음악의 끝엔 오늘 저녁에 있는 공연의 홍보지를 무작위로 뿌리고는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 틈에 녹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훈은 다섯 팀 중 이대 팀에 있었다. 그런데 퍼포먼스 초반의 점프 후 착지하는 동작에서 발을 접질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점점 늘어나는 여대생 관객들에게 홍보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퍼포먼스가 끝날 때까지 아픔을 참고 춤을 췄다. 공연장으로 가는 길, 괜찮냐고 물어보는 단원에 세훈은 인상을 쓴 채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이미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발목이 시큰거렸다.

  저녁 공연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이씽과 안무의 대부분을 짠 종인은 리허설 때문에 홍보팀엔 나가지 않았었다. 반면 세훈은 공연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기에 두 발 벗고 홍보팀에도 나간 것이었는데 뜻밖의 부상으로 그것마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같이 홍보에 나갔던 단원들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다 온 세훈은 반깁스를 하고 공연장에 나타났다.


  “세훙, 아무래도 쉬눈 고가 조울 거 가타.”

  “야 넌 뭔 홍보를 목숨을 걸고 하고 그래…….”


  리허설을 하고 있던 이씽과 종인은 세훈을 보고 놀라서 무대에서 내려왔고 속상해서 세훈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종인은 툴툴거렸지만 사실 눈이 시큰했다. 그래도 제일 속상한 건 세훈이었다. 단지 무대에 오르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씽의 마지막 무대를 함께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세훈은 속으로는 다쳐버린 자신을 바보 등신이라고 욕하면서도, 두 형이 자기 걱정에 무대에 집중하지 못할까봐 괜찮다는 거짓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세훈의 빈자리는 이번 공연에 참여는 않지만 안무는 전부 외우고 있는 종인이 채우게 되었다.










  경수는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빨리 도착했다. 그 때 종대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귀 끝이 시렸지만 경수는 맛있는 거 사라는 농담으로 유순하게 넘어가주었다. 하지만 웃으며 전화를 끊자마자 불길한 생각이 밀려왔다. 공연장 앞에서 종대를 기다리다가 종인을 마주치면 어쩌나. 경수는 인중을 꼬물꼬물 움직이고 눈을 도르르 굴리며 고민하다가 공연장 건물 옆 구석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리고선 고개만 밖으로 빼꼼 내밀어 종대가 오나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 주변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겐 그런 행동이 더 수상해 보일 뿐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역 출구가 있는 오른쪽만 쳐다보고 있던 경수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소음 속에서도 박혀 들었다. 경수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와- 레이 형 막공이라고 돈 좀 들였나? 꽤 큰 거 같다.”

  “그러게. 원래 길거리 공연도 하고 그랬잖아.”

  “엉. 하긴 좀 유명한 팀이긴 하지. 근데 여기서 하면 밖까지 막 빵빵뚠뚠거리는 거 아냐?”

  “어 진짜. 아 맞다, 표 너한테 있지?”

  “뭔 소리야. 집에서 나올 때부터 네가 갖고 있었잖아.”

  “나 없는데? 내가 아까 화장실에서 너 줬잖아.”

  “뭐? 그랬어? 진짜야 박찬열?”

  “하하하. 뻥이지롱. 여기 있다!”


  찬열은 코트 주머니에서 날쌔게 티켓을 빼들었다. 백현은 뭐 하냐며 언성을 높였고 주먹을 들어 찬열의 팔뚝으로 뻗었다. 찬열은 맞을까봐 두 손으로 양팔을 감싸며 재빨리 옆으로 빠졌다. 경수는 들킬라 얼른 고개를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본 두 아이들의 표정은 하하껄껄 웃는 것이었다.


  “뭐야, 김종대. 아무도 안 온다며…….”


  경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찬열과 백현은 서막일 뿐이었다. 둘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내민 경수는 차례대로 준면과 타오, 루한과 민석을 보았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종대는 행렬의 끝에서야 나타났다.


  “야 김종대!”


  경수는 종대를 보자마자 구석에서 뛰쳐나갔다. 이미 다른 식구들은 전부 와서 입장을 마친 상태였다. 경수는 그것 하나만 기억하고 종인을 마주칠까 해서 숨었던 애초의 걱정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종대는 경수에게 미안하니 저녁을 사겠다고 빌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

  “사람들……, 식구들 다 왔잖아. 네가 우리밖에 안 온다며.”

  “뭐어? 진짜?”


  종대는 정말 몰랐는지 경수에게 진짜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경수는 어쩔 수 없어, 헛웃음을 짓고 그만 들어가자며 종대를 잡아끌었다. 종대는 경수의 기분이 풀린 줄 알고 다 같이 모여서 공연을 볼까 물었다가 퇴짜만 맞았다. 식구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가 온 걸 알면 종인의 귀에도 그 사실이 들어갈까봐 걱정돼서라는 건 경수만의 비밀이었다.






  특별한 줄거리 없이 음악에 맞춰 춤만 추는 무대가 세 번 이어지고 이씽이 주인공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이씽은 로봇이었다. 팔다리를 비롯해 몸 전체는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춤을 출 때도 표정의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 로봇은 여러 곳을 여행했고 여러 동식물과 사람을 만났다. 동물들에겐 본능만이 가득한 생의 현장을, 식물과 자연에겐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사람들에겐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로봇이 그것들을 배우는 과정은 각각의 생명체들에게 그 특징이 나타나는 춤을 따라 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동물과 사람과 만날 때는 배틀 형식이 녹아들어 있어 분위기를 띄웠다. 여행을 마친 로봇은 끈적하고 농밀한 몸짓과 부드러운 웨이브를 소화할 수 있었고 각각의 동작에 어울리는 표정도 짓게 되었다.

  그러나 경수는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로봇이 자연을 만난 그 때부터. 그의 뇌 속 깊이 인식된 것은 전체 무대 중 극히 일부분인 종인의 모습이었다. 종인은 나무였다. 그런데도 바람에 살랑이는 가지를 표현하는 그의 몸짓 하나, 눈빛 하나가 경수의 큰 눈에 가득 들어찼고,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포화상태가 된 두 눈에선 눈물이 넘쳤다. 눈물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 몸짓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더 이상 설명할 여지는 없었다.


  “종대야, 나 먼저 갈게.”


  공연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경수는 이번 무대가 끝나자 종대에게 귓속말을 했다. 종대는 경수를 붙잡지 않았다. 소리도 없는 경수의 눈물을 곁눈질로 본 까닭이었다. 눈물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종인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더 안 보냐고 예의상 한 번 물어보기만 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고 새로운 무대가 시작되기 위해 어둠 속에서 강한 비트가 울렸다. 방금 끝난 이씽의 무대에 대해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고 있던 관객들은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자 일제히 입을 다물고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조명이 켜져 앞이 보이자 경수는 발을 뗐다. 모두가 가만히 서 있는 곳에서 혼자만 움직이는 경수의 몸은 단연 눈에 띄었다.

  종대는 경수가 작은 몸으로 사람들 틈을 뚫고 계단 입구까지 가는 걸 지켜보고 나서 식구들이 있는 앞쪽으로 나왔다. 종인은 여전히 무대 뒤에서 공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맨 앞줄에서 티격태격하는 백현과 종대를 보았다. 저 형이 언제 왔지, 생각하는데 관객석을 향해 조금 올라간 시선을 따라 계단을 올라 나가는 인영을 보았다. 그 순간, 종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종인은 눈 밑을 찌푸린 채 유유히 퇴장하는 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스텝들은 무작정 밀치고 나가는 종인에 짜증을 내거나 왜 그러냐고 묻거나 했다. 하지만 종인은 출구를 향해 나가는 것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가 맞나 안 맞나 확실하지도 않았고, 그가 맞다고 해도 왜, 어떻게 온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오랜 시간 연습한 안무는 노래 전주만 들어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과 같이 다리가 제멋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계단을 다 올라와 건물 밖으로 발을 내딛으면 종인을 맞이하는 건 어두운 밤하늘과 차가운 공기였다. 종인이 내뱉는 뜨거운 숨이 그의 눈앞에 하얀 입김을 만들어냈다. 종인은 어느 쪽을 찾아보아야 할지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바쁘게 굴러다니는 눈동자는 미아처럼 불안함을 가득 껴안고 있었다.


  “없어……, 없어졌어…….”


  그 뒷모습이 경수 것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한 채, 종인은 그의 흔적 없는 밤거리를 한참 둘러보았다. 고개를 젖히고 긴 숨을 뿜어내고 나면 쭉 펴진 목울대가 울렸다. 도시의 까만 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식구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고 동아리 삼인방은 뒤풀이를 갔다가 적막만 남은 밤에야 집에 왔다. 현관 중문을 밀면 깜깜했던 거실의 불이 갑자기 켜지며 폭죽이 터졌다. 기다리다가 진 다 빠졌다는 타박에도 이씽을 위한 송별회는 활기찬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종인은 집에 들어와 종대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종대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이씽의 무대가 끝나고 모습을 드러낸 종대, 그리고 동시에 보인 경수의 뒷모습이 어떤 관계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종대가 식구들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게 예삿일이니 의심이 갈 수밖에. 그 형 왔었어요? 왔던 거 맞아요? 왔던 거 알아요?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거실의 불이 꺼지고 식구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종대를 잡지 않았다. 가족들 누군가에게 경수가 왔었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기라고 하면 이젠 다 식은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흔들릴 것 같았고, 아니라고 하면 그 마음이 또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모순적이지만 사실이었다.










  송별회는 두 시부터 끝내자고 얘기한 것이 미루고 미뤄져 거실 소등은 세 시에 이뤄졌다. 식구들은 아침 비행기인 이씽에게 그냥 밤을 새고 가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이씽이 정말로 한숨도 자지 않고 짐을 싸고 청소를 한 것은 아무도 몰랐다. 겨울이 되어 이 집에 들어올 때보다 짐이 늘어나 버거워 보이는 이씽을 본 것은 준면이 유일했다.

  8시 50분. 비행기 출발 40분 전, 종대는 ‘아! 씽씽이 형!!’하며 눈을 번쩍 떴다. 급하게 방을 나가 노크도 생략하고 이씽의 방문을 벌컥 열었지만 방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아이씨, 종대는 또 다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준면은 일요일인데도 1층 가득히 커피 향을 뿌리고선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형 갔어요?!”


  종대가 계단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준면에게 소리치듯이 물었다.


  “어, 진짜로 밤 샜다더라. 나도 겨우 일어나서 아침밥만 간신히 먹였어. 그러고 다시 좀 자고.”


  망연자실한 종대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바보 같다느니, 어떻게 알람도 못 듣냐느니 한탄을 늘어놓는 종대에게 준면은 그럴 수도 있다며 인심 좋은 미소를 지었다. 준면이 살살 어르자 종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축 쳐진 어깨로 부엌에 가 제대로 앉을 곳인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침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선 소파에서 다시 잠들었다.

  아침잠이 별로 없는 민석으로 시작해, 잠도 많고 피로도 쌓여 있고 어제 일로 정신적 스트레스도 많이 받은 종인을 끝으로 정오에는 식구들이 모두 깬 상태가 되었다. 눈과 입술이 퉁퉁 부은 채 먹을 것을 입에 우걱우걱 넣던 종인이 각자 점심이며 아점을 먹고 있는 식구들을 쭈욱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오세훈은요?”


  뜬금없는 질문에 식구들은 일단 종인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자 종인이 퉁퉁한 입술을 움직였다.


  “방에도 없던데.”

  “진짜?!”


  식구들은 놀라서 되물었지만 종인은 볼 안 가득 집어넣은 음식을 담담히 씹기만 했다. 송별회가 끝나고 잠들기 전, 오늘 수고 많았다고 서로를 다독이다가 잠든 종인과 세훈이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밤에 집에도 들어왔고, 잠도 잘 들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언제 사라진 것인지. 준면이 이씽을 배웅하고 잠깐 잠든 사이에 나간 걸까. 아무리 그래도 바로 옆방인 준면이 그 소리를 못 들었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 잠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세훈이 그 시간에 일어났다는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발도 다친 애가 가기는 어디를 간다고. 식구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종대는 메신저의 단체 채팅방에 오세훈 어디 갔냐고 키패드를 쳤다.






  “……그것 때문인가…….”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상처와 기억은 시간에 바래갔고, 일상을 끔찍하게 만들진 않지만 지울 수는 없는 흉터로 남았다. 그런데 올해 들어, 어느 날부터, 끔찍한 사고 장면과 생전의 형의 모습이 다시금 세훈의 꿈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자신의 형과 닮은 이씽 때문인가 세훈은 의심했었다.

  결국 혼자 답을 찾을 수 없어 종대에게 도움을 받고, 답지 않게 수많은 고민을 해본 결과. 목욕탕에서 벗은 몸의 이씽을 보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성적인’ 감정을 그에게 갖고 있는 건 아닌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몇 년 만에 형이 그토록 생각나고 이씽을 저도 모르게 챙겨주려고 했던 이유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이상적이고 감성적이던 형은 세훈으로 하여금 집의 막내답지 않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성질을 갖게 했다. 세훈은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형을 닮고 싶지 않아 했으나 동시에 형이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황 파악을 잘 하게 됐으나 복잡한 것이 싫어 문제를 알고서도 외면하곤 했다.

  세훈은 깊은 생각과 깊은 관계는 짐만 될 거라는 가치관을 무의식중에 심기 시작했다. 속 얘기를 잘 하지 않게 되었고 인간관계에서도 적당한 선을 긋게 되었다. 하지만 연상인 사람에게의 처세는 형에게 했던 습관 때문에 형을 잃은 후에도 능했고, 그 상대가 자신과 반대인 형과 비슷한 성향이라면 그 능력은 더욱 더 빛을 발했다. 이씽에게도 마찬가지였을 뿐이었다. 가벼운 관계는 이씽이 문득문득 자신의 얘기를 던지면서 차차 복잡해져 갔다.

  이씽은 자기애가 부족했다. 스스로를 보잘 것 없게 생각했다. 그래서 춤이든 무슨 일이든 더 열심히 목숨을 걸고 하려고 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꿈에 매달리는 그 모습 때문에, 세훈에게 있어서 단지 자기 자신과 다른 ‘내성적’인 성격의 연상이었던 이씽은 제 형과 닮은 사람으로, 세훈의 안에서 점점 변모해 갔다.

  형과 닮은 이씽은 형을, 그리고 형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 끔찍한 광경을 끄집어내게 했다. 그래서 세훈은 이씽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어하려는 마음보단 형의 죽음과 같은 일을 다신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형에게 해주지 못했으니 그 경험으로 깨달은 것을 새로운 사람에겐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세훈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엔 약해서, 그 이유는 알지 못한 채 자기도 모르는 새 이씽을 의식하게 되었다. 좀 더 많이, 좀 더 섬세하게, 좀 더 따뜻하게 그를 보게 되었다.


  알람은 일부러 이씽이 나간다고 한 시간보다 일찍 맞춰뒀다. 자유롭지 않은 발로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 다른 식구들은 몰래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려는 심산이었다. 사실 알람이 신경 쓰여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를 마지막으로 마주한 지금, 세훈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느꼈다. 형의 죽음을 인생에서 완전히 지울 순 없지만 자신은 살아가야 한다는, 그래서 그 일은 지워지지 않지만 눌러도 아프진 않은 흉터로 남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던 때처럼.


  “…….”


  이씽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나니 카운터 출구엔 세훈이 있었다. 반가워서 웃으며 언제 어떻게 왔냐는 이씽의 물음에도 세훈은 무미건조하게 짧게 답할 뿐이었다. 이씽이 뭐라도 먹을까 했지만 세훈은 고개를 저었다. 목적 없이 터벅터벅 걷던 둘은 출국장 앞에 줄 맞춰 있는 수많은 의자 중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세훈의 딱딱한 반응에 이씽도 이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오물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형은, 왜 누구를 열심히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일 분도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어 하는 세훈이 십여 분 만에 꺼낸 말은 참으로 뜬금없었다. 이씽은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세훈을 바라보았다. 세훈은 이씽을 흘끗 마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왜, 그 때, 종대 형처럼 열심히 좋아할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세훈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다리를 떨고 입술을 여러 번 깨물었다. 이씽은 세훈에게 박혀 있던 눈을 떼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너 구고를 기옥하고 있어쏘?”


  응. 세훈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씽은 궁금증 가득한 눈으로 세훈을 볼 때와 다르게 힘이 빠진 눈으로 공항의 깨끗한 천장을 바라보며 답을 고민했다.


  “구냥.”

  “네?”


  세훈은 오늘 처음으로 좀 세훈답게, 생기 있게 놀랐다. 이씽은 그런 세훈에게 눈을 접어 웃어주었다.


  “구냥. 이십팔 년 살묜서 요기가 터질 꼬 가취 누구 조아해 본 저기가 업수니까.”


  이씽은 요기라고 말할 때 제 가슴 한가운데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돌아온 답이 생각보다 간단해 세훈은 입을 어 벌리고 멍한 눈으로 이씽을 바라보았다. 이씽은 그 표정이 웃기다며 쿡쿡거리곤 세훈의 허벅지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기오캐조서 고맙따.”

  “……고맙긴.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형 몸이랑 마음이 건강해야 꿈도 의미가 있는 거니까…….”


  한 음절 한 음절마다 쉼표가 있는 것처럼 천천히 말하는 세훈. 이씽은 여섯 달이라는 시간 만에 세훈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 모습은 다른 식구들은 본 적 없는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형의 얘기를 들었던 준면과 종대도.

  세훈이 말을 천천히 잇는 것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그걸 누르려고 해서였다. 이씽은 세훈의 허벅지 위에 있던 손을 거두어 올렸고 세훈의 마른 등판을 잔잔히 두드려 주었다.


  “웅, 고마오.”


  짧은 한 마디와 이씽의 미소에 세훈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훈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무릎을 껴안은 팔위에 이마를 묻었다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하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 형이 죽었을 때도 장례식 때도 충격 때문에 눈물은 나지 않았었다. 일 년 후 쯤, 수능이 끝나고 귀가했을 때, 아무도 없는 집에서 텅 빈 형의 방에 들어간 세훈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었다. 입시생이라는 압박감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그 때 처음으로 실감을 했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한 번도 그렇게 울지 않은 세훈은 그 날처럼 울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땐 혼자였고 지금은 이씽이 옆을 지켜준다는 것이었다. 묵묵히, 하지만 듬직히.




  세훈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씽은 좀 괜찮냐고 세훈 앞으로 고개를 빼꼼하며 물었다. 눈이 시뻘개진 세훈은 펑펑 운 게 창피해져서 이씽을 보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이씽은 여전히 세훈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니가 날 왜 구로케 잘 해주눈지는 모르게쏘. 그래두 난 안 무러보꼬야. 나중에, 나중에라도 우리가 만나쑬 때 얘기해주묜, 그 때 두룰게. 메일이나 문자두 괜짠쿠.”


  이제 슬슬 가야 할 때였다. 세훈은 든든한 이야기를 어눌하게 말하는 이씽 때문에 웃음을 되찾았다. 세훈이 풋 하고 웃으니 이씽이 울다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는 한국사람 같은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씽을 따라 출국장으로 가는 세훈의 발걸음은 이곳까지 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이씽은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돌아 세훈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안녕을 말했다. 그러고 다시 발을 떼는 이씽을 세훈이 잡았다.


  “다시 만나야 돼요. 꼭, 살아서.”


  멀뚱멀뚱. 세훈을 보고 있던 이씽의 눈이 잠시 틈을 갖더니 이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구래. 열쒸미 춤추면소 살구 이짜. 아랏쮜?”


  세훈은 이씽처럼 웃어주고 싶어서 미소 지었고, 그러면 부은 눈두덩이 당겼다. 잘 가요. 아니, 잘 갔다 와요. 세훈은 출국장의 자동문이 닫힐 때까지, 작아지는 이씽의 뒷모습을 지켜봐주었다.










  이씽이 떠난 지도 아흐레. 오늘 지는 해는 좀 더 특별했다. 올해의 마지막 해인 것이었다. 일곱 식구들은 거실에 모여 앉아 방송 삼사의 연말 시상식을 돌려 보며 치맥을 하고 있었다. 새해가 오기 10분 전, 종대의 핸드폰이 크리스의 이름을 띄우며 울렸다. 종대는 누가 들어도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둘은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떠들었는데 준면이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통화를 하자고 했다. 크리스가 흔쾌히 찬성하자 종대는 스피커폰 모드로 설정을 바꿨다. 막상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니 인사만 오갔을 뿐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백현이나 찬열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어색할 틈도 없이 시끄럽고, 시끄러운 걸 너머 정신이 없었을 거라고 종대는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다.


  -그러게, 아쉽네……. 근데 왜 없는데?


  크리스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 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크리스에게 조금 특별한 존재였다. 종대와 동갑내기 친구이며, 종대가 처음으로 의심을 하고 연애 상담을 해준 주인공들이기도 하고, 셰어하우스의 식구들 중 유일하게 크리스와 접촉이 있었으니까-종대는 크리스가 두 친구와 만났었다는 건 몰랐지만. 어쨌든 둘은 새해맞이로 정동진 일출을 보러 갔다고 종대가 알려주었다.


  “근데 형들은 왜 안 갔어요?”


  찬열과 백현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커플의 정석인 맏형 둘은 왜 여행을 안 갔나 싶어 종대가 물었다.


  “우린 이미 갔다 왔지. 옛날에.”


  루한은 고개를 민석 앞으로 빼꼼 내밀며 동의를 구했다. 민석은 식구들 앞에서의 애정표현은 아직도 부끄러워서 루한과 눈을 못 마주치고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루한은 그 모습을 또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종인과 세훈은 토 나온다는 제스처를 하며 야유했다.


  “형, 들었죠? 와- 진짜 이 형들이 제일 닭살이라니까. 아니, 지금 막 루한이 형이 민석이 형을 엄청……, 하, 이걸 뭐라고 해야 되지? 막 좋아 죽겠다는 것처럼 봤다구요.”

  -아아, 내가 종대 보는 것처럼?

  “…….”


  어어우. 이러려던 게 아닌데. 종대는 진정한 팀킬에 당황해서 눈치만 스윽 보았다. 종인과 세훈은 또 목을 잡고 구역질난다는 시늉을 했고, 루한과 타오는 어색하게 웃었으며 민석은 제가 보기엔 종대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고 놀렸다. 그래도 거기까진 장난기도 좀 있고 웃음도 좀 있는 분위기였는데 준면이 다음에 던진 단 한 마디가 찬물을 끼얹었다.


  “닭을 먹어서 닭살이 돋나, 하하.”


  어색한 웃음은 가라앉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덧붙인 것이었다. 모두가 싸늘한 눈초리로 준면을 쏘아대는 중 그 부장님 개그에 웃고 있는 건 타오 하나였다. 대체 저런 센스로 소설은 어떻게 잘 쓰는 건지, 나머지 식구들은 의문을 품었다.

  전화를 통해 제야의 종소리도 함께 듣고 새해 복 많이 받자, 신넨콰이러, 해피 뉴 이어 등의 다국적 새해 인사가 오가는 중 세훈의 핸드폰도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울렸다. 타오에게 신넨콰이러 발음을 배우고 있던 세훈은 핸드폰 화면을 보고서 벌어지는 입을 막고 놀랐다가, 아직 낫지 않은 다리 때문에 벌떡 일어나진 못하고 제자리에서 엉덩방아만 쪄대며 박수를 쳤다. 식구들은 뭔데 그러냐며 세훈을 보았다.


  “씽이 형이에요. 것도 영상 통화.”


  그러자 타오가 자기도 하겠다며 세훈 옆으로 가서 앉고 팔을 잡고 매달렸다. 종인도 자기도 바꿔달라며 타오의 뒤를 따랐다. 준면은 이리 가져와 보라고 손짓했지만 세 명의 막내들은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래도 결국엔 식구들과 다 같이 통화할 걸 아는 민석과 루한은 자리에 앉은 채로 여유 있게 차례를 기다렸다.


  “어어어? 나도 할래, 나도오!”


  시끄러운 막내들 대열에, 그것도 이씽과의 영상 통화가 걸린 일에 종대가 빠질 리 없었다. 종대는 랩이라도 하는 듯 자기도 씽씽이 형과 영상 통화를 꼭 해야겠으니 이따 또 연락하자고, 정말 진짜 미안하다고 빠르게 크리스에게 말하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종대가 엉덩이를 훌훌 털고 일어나 동생들에게 가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갑자기 전화가 끊긴 크리스는 황당해서 꺼진 핸드폰 화면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종대가 잘 따르고 좋아해서 퍽 마음에 들진 않았던 이씽에게 불타는 질투가 이는 새해의 시작이었다.










-
3. 내가 이 셰어하우스에 사는 것도 아닌데 씽이 송별회와 씽이가 떠나는 장면 같은 걸 쓸 땐 마음이 정말 허하고 텅 빈 느낌이었다. 홈스홈 자체도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이렇게 커질 줄 몰랐던 홈스홈.. ㅜㅜ 정들어 버린 걸까..?!

140228

 

Posted by Neese
l




 

W.유쫑




 

35.기회비용






  하루 일과를 마쳤지만 종대는 오늘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누르지 않았다. 주소록에서 이름을 검색해 찾은 번호를 핸드폰 화면에 띄워놓고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은 버튼 위에서 작은 동그라미를 몇 번이나 그렸다. 짧지 않은 고민의 시간. 종대는 입술을 한 번 꾹 맞물리고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받는 사람 역시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에 긴장했던 건지 신호음이 끊기고 조금의 틈이 있은 후 목소리를 냈다.


  “어, 경수야. 잘 지냈냐?”


  시작은 늘 그렇듯 가벼운 안부로. 첫눈 온 날, 뜻밖에 통화를 하고 뜻밖에 만나기까지 해 점심을 먹은 뒤로 근 한 달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한결 같은 목소리는 서로에게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안부 인사가 끝나고 당연한 수순으로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자 경수는 종대에게 전화를 건 목적을 물었다.


  “아아, 아니, 별 건 아니구. 씽씽이 형……, 레이 형이 좀 있으면 중국으로 돌아가거든.”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같이 보러 가지 않겠느냐, 그것이 종대가 전화를 건 이유였다. 경수는 이씽을 본명이 아닌 레이라고 부르곤 했었기에 종대가 금방 고쳐 말했지만, 경수가 한 집에 살았던 가족을 그 새 잊었을 리는 없었다. 처음에 씽씽이 형이란 종대만의 별명을 들었을 땐 생소해서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눈을 굴려 3초 정도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씽이 춤 연습을 가는 팀이 어디인지, 그곳에 누가 소속되어 있는지, 경수는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공연을 보러 간다면 ‘그 누구‘도 봐야 할 것이 분명했다. 경수는 습관적으로 눈을 도르르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여보세요? 경수야?


  잠잠한 수화기에 종대는 전화가 끊긴 줄만 알았나보다. 어 왜, 경수는 끊지 않았다는 걸 알려줄 정도로만 간단히 소리를 내곤, 고민을 할 때면 늘 그렇듯 입술이 안 보이도록 꾹 다물었다.


  “다른 애들은?”


  입을 다문 채 인중을 꿈틀거리며 고민한 결과로 나온 답은 겨우 다른 애들도 가는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경수는 제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는 한편, 다른 사람 눈치나 보는 것 같은 말이 형편없어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그걸 알 리 없는 종대는 해맑게 답할 뿐이었다.


  -모르겠는데. 물어볼까?

  “어? 어어, 어…….”


  어차피 다른 식구들이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공연을 보러 가면 자신은 종인을 봐야만 할 텐데, 행여나 종인도 자신을 보면 어찌 하라는 말인가. 경수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대는 알겠다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들뜬 목소리로 밝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 일’의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한참 내려다보는 경수의 손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오묘한 끈끈함이었다.










  종대는 일단 네 마음이 뭔지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냐며 갖가지 방안을 갖고 세훈을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엄청난 걸 갖고 왔다고 늘 들떠 있었지만 세훈은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제일 좋은 핑계거리는 기말고사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때로는 춤 연습을 하고 와서 샤워까지 싹 끝낸 종인이 방에 들어오는 걸로 세훈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씽을 좋아한다고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닌데 기라는 가정 하에 떠들어대는 종대는 세훈에겐 좀 불편한 것이었다. 가끔이었지만 공강 날이나 오후 수업만 있는 날이면 가본 지가 언젠지도 가물가물한 도서관에 가겠다며 집을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으아아아악!!!! 아!! 아 답답해!”


  그런 날이 일주일도 넘게 흘렀다. 세훈은 더 이상은 한계라고 느꼈다. 답답함에 책상 등받이에 허리를 깊이 뉘인 채 허공에 헛발질을 해댔다. 몸이 점점 아래로 흘러내려가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머리칼이 뜯겨져 나갈 정도로 세게 쥐었다. 온 방안을 쿵쿵거리며 휘젓고 다니고,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빠졌고, 또 방안을 휘젓고 다니는 걸 수차례 반복한 세훈은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야, 너 방에서 뭔 난리를 치냐.”


  세훈이 방에서 쿵쾅거리는 소리는 야근 때문에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던 찬열과 백현에게도 들렸었다. 찬열은 계단을 향해 힘찬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세훈을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몰라요, 내가 미쳤나 봐.”


  세훈은 부엌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백현과 찬열이 쟤 왜 저러냐고 수군거렸지만 지금부터 벌어질 일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세훈에겐 들리지 않았다. 2층에 다 올라온 세훈은 계단 쪽을 지나던 발을 뒤로 물렀다. 고개를 천천히 돌렸고, 계단 옆으로 나 있는 이씽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꿈쩍도 않았다. 움직인 것은 깜빡이는 속눈썹뿐이었다. 세훈은 그렇게 빈 방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종대는 자기감정을 잘 모르겠다고 찾아왔던 날 이후에 처음으로 먼저 온 세훈에 반색이 되었다. 하지만 세훈은 방방 뜬 종대를 침대에 얌전히 앉혔다. 아무 말도 없이 종대를 바로 보지 못하는 옆모습은 안 좋은 예감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왜? 너 설마, 형한테…… 무턱대고 고백한 건 아니지……?”

  “아-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세훈은 종대를 곁눈질하며 짧게 웃었다. 그럼 지금 같은 시점에서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유가 무얼까. 종대는 눈에 힘을 주고 세훈을 들여다보며 곰곰이 생각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연애 상담과 친형의 죽음은 상당히 동떨어진 주제였으니까. 종대는 왜 그러냐고, 답답하니까 빨리 말해보라고 주인에게 재롱을 떠는 강아지처럼 세훈의 옆에서 치덕거렸다.


  “내가, 말을 할 테니까, 잠깐만. 좀만 기다려 봐요.”


  세훈은 진정하라는 듯 손으로 종대의 허벅지를 지그시 감쌌다. 그 동작이 주문이라도 되는 냥 종대는 좀 얌전해졌고 그 제야 방이 세훈의 표정에 걸맞게 차분해졌다. 세훈은 습습후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심호흡을 하기도 했고, 종대의 허벅지를 감싼 손에 힘을 줬다 뺐다 하기도 했다. 세훈 나름대로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종대가 보기엔 산만하기만 한 동작들이 이어지길 십 분 정도. 세훈은 말을 꺼내기 전에 종대를 몇 번이나 돌아다보았고 종대는 그럴 때마다 말해보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하지만 세훈은 번번이 실패했고 종대는 한숨 섞인 웃음을 짓곤 했다. 이번에도 별 다를 게 없어 보여 허무한 미소를 짓는데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내 마음을 모르겠는 건……, 씽이 형이…….”


  세훈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제 다리 위에서 손을 거두는 세훈을 종대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고선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죽은 내 형이랑 닮아서예요.”

  “…….”


  세훈에게 형이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죽은’이라니. 죽었다니. 종대의 시선은 여전히 세훈을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사라져 있었다.


  “하핫.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아 시원하다. 이거 하나 말하기가 어려워서 멘붕이었거든요. 근데 형도 알고 있어야 씽이 형 얘기도 진전이 있을 것 같지. ……우리 형, 뭐 어디 아팠던 것도 아니고 사고사도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난 가끔 씽이 형도 우리 형 같은 결정을 내릴까봐. 좀 걱정돼요. 조금, 많이.”


  세훈은 무겁고 하기 힘든 말을 하는 거라곤 믿을 수 없게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래서 그는 마치 죽은 형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망설임이란 요소를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 그동안 종대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신없이 입을 놀리던 세훈은 조용한 종대가 이상해 그를 한 번 살폈는데 울 것 같은 얼굴이라 깜짝 놀랐다.


  “왜 그래요. 나 땜에?”


  죽음이란 말을 들은 종대의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가 빠르게 맞물려졌다. 가끔씩이었지만, 이 집의 막내답지 않게 식구들 각각의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챙겨주던 세훈,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진 않지만 알고 보면 다 듣고 있던 세훈, 그리고 그 모든 걸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보고 있으려던 세훈. 비밀스러워서 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느껴지던 성숙함은 아픔을 감내한 결과물이었나 보다.

  그냥 기특한 막내 정도로만 세훈을 생각하던 종대는 그게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가슴이 아픈 동시에 세훈이 여태껏 살아내 준 것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를 보고 웃는 세훈에게 눈물을 보일 수야 없었다. 제가 울어버리면 세훈은 말을 꺼낸 것을 미안해할지도 모른다. 이 아이라면 티내지 않아도 그럴 것이라고 종대는 생각했다. 그래서 말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건네고 밝은 이야기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럼 정말, 씽씽이 형을 좋아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아- 나 완전 혼자 김칫국 마신 거 아니냐?”

  “어때, 맛있었죠?”

  “어 그래. 너무 많이 마셔서 배터지겠다.”


  종대가 배를 빵빵 치니 세훈이 하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무튼 그래서 내가 내 맘이 헷갈린다는 거예요. 내가 그 형을 좋아하는 건지, 아님……, 우리 형하고 너무 닮아서 걱정이 되는 것뿐인지."


  그럼 그건 좀 더 지켜보기로 하자. 연애감정이 아니어도 도와주겠다며, 괜찮다는 세훈의 말에도 종대는 한사코 포기하지 않았다. 될 수만 있다면 곧 떠나는 이씽과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세훈, 둘 다가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고맙다."


  종대는 세훈을 따라 나와 계단 통로까지 바래다주었다. 계단 몇 칸을 내려가 저보다 눈높이가 낮아진 세훈의 뒤통수에 대고 종대는 말했다. 세훈은 뒤를 돌아 뭐가 고맙냐며 종대를 올려다보았다. 종대는 네 형 이야기 해줘서, 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방으로 돌아온 종대는 문을 꼭 닫고 팔을 뒤로 해 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를 젖혀 문에 기대어 한참을 서 있었다. 종대에게도 형이 하나 있다. 무뚝뚝한 것이 종대와 전혀 다른 성격이어서 어릴 때부터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형이 자살을 한다면 자신은 세훈처럼 명랑하게 웃는 얼굴로 주변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세훈이 종대는 더 대견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영화에서처럼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이상, 그 일은 세훈의 인생에 주홍글씨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훈은 친형과 닮은 이씽을 보면 자연스럽게 친형이 떠올랐을 것이고, 아마 그것 때문에 이씽이 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던 거라고 종대는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그러고 나니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동아리에선 둘이 잘만 지낸다는 종인의 증언도, 이씽이 한 식구가 되고 나서는 반대했었다고는 믿을 수 없게 이씽을 끔찍이도 아끼고 챙겨주던 세훈의 모습도.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친형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크리스와의 통화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아까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으니 그 뒤로 미뤄야겠다. 종대는 침대로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을 옮겼다.






  남남 연애 상담가 김종대 선생 가라사대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껴안아 보거나 뽀뽀를 해보면 몸이 먼저 느끼는 바가 있을 거라는 꽤 괜찮은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우습게도 그건 스스로 말하고도 금지시켰다.


  “씽씽이 형한테 엄한 장난치면 내가 가만 안 둘 거다?”

  “아 미쳤어요?!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으유 그랬쪄요? 우리 오세훈 그랬쪄요?”


  종대는 부엌에 앉아 있는 세훈의 목을 세게 끌어안으며 장난을 쳤다. 그러다 루한과 민석을 시작으로 다른 식구들이 하나둘씩 방에서 나오고, 이씽도 춤 연습을 가기 위해 내려오니 둘은 시치미를 뚝 떼고 밥을 먹었다. 세훈은 다른 식구들이 보지 않을 때 입 모양으로 어떻게 하냐고 종대에게 자꾸만 물었다. 하지만 입모양만으로 뻐끔뻐끔 떠드는 소리도 시끄러워 식구들의 눈총을 샀다.


  “너네 진짜 뭐 하냐?”


  종대가 종인, 이씽의 뒤를 따라 집을 나가는 세훈에게 파이팅이라고 손동작까지 취해보이니 보다 못한 백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세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종대는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식구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종대는 이제 거의 일주일밖에 안 남은 이씽과의 시간을 세훈이 잘 써주길 바랐다.








  하루 종일 틈날 때마다 고민한 결과, 춤 연습이 끝날 때 세훈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바로 목욕탕이었다. 연습 때문에 땀까지 싹 뺐고 종인까지 같이 간다면 수상해 보일 염려는 전혀 없을 것 같았다. 또 포옹이나 뽀뽀처럼 직접적인 접촉이 없지만 벗은 몸을 보고도 흥분하느냐의 여부는 똑같이 알 수 있으니까 실로 탁월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찜질 셋이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수건과 찜질복을 받고 남성용 탈의실로 들어가는 세훈은 가슴이 덜덜 떨려 호흡곤란 증상마저 보이고 있었다. 아냐,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무 문제없을 거야. 세훈은 쉴 새 없이 자기 자신을 타이르며 옷 벗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종인은 그런 세훈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둘이서 목욕탕을 자주 와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두세 번은 와 봤었고 연습실에서도 훌렁훌렁 잘 갈아입기만 했는데, 지금의 세훈은 남탕에 들어온 여자처럼, 혹은 여탕에 들어온 남자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종인은 바지를 벗다말고 세훈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터억 잡았다.


  “엄마아아!! 아오, 아유, 깜짝이야.”

  “내가 더 놀랬다. 뭐야 너 왜 그래.”

  “아, 아니…….”


  종인이 놀래는 바람에 무심결에 뒤를 돈 세훈은 종인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씽도 보고 말았다. 이씽은 찜질복을 입기 전, 연습실에서 땀범벅이 됐던 몸을 씻으려고 옷을 전부 벗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이씽은 세훈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고 그대로 걸어서 다가왔다.


  “나 몬죠 가 이쑬게. 언눙 두러와.”


  이씽은 하얀 속살을 뽐내며 종인과 세훈을 지나쳐 탕으로 들어갔다.


  “……네, 형!”


  목욕탕 건물에 발을 디딘 후로 계속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던 것 같은 세훈이 오른손을 높이 쳐들며 말했다. 우렁찬 목소리에 목욕탕의 시선이 세훈과 종인에게 쏠렸다. 종인은 창피하게 뭐 하는 거냐며 무방비상태인 세훈의 배를 아프지 않게 때렸지만 세훈은 맞고 나서도 싱글벙글이었다. 백 년 묵은 체증이 씻겨 나가는 듯 개운하고 상쾌했다.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하는 세훈을 보며 종인은 여자처럼 가슴이라도 생겨서 그러는 줄 알았다고 안도 섞인 농담을 내뱉었다.










-
140222

Posted by Neese
l



W.유쫑




34.넘어간다면, 넘어온다면






  타오는 허공에 대고 몇 번이나 꾸벅꾸벅 인사를 해댔다. 그러다 한 번, 상모를 돌리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질 만큼 상체를 휙 일으켰다. 크크큭. 뒤쪽에 앉은 여학생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타오는 민망해서 스트레칭을 하듯 고개를 좌우로 꺾었고, 뒷목을 매만졌고, 헛기침을 했다. 얼굴에 열이 훅훅 오르는데 옆에 앉은 오세훈은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지. 뭐 하냐고 비웃었어도 열 받았겠지만 목석 같이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좋은 건 아니었다. 타오는 보다 민망해져서, 곁눈질로 멍한 세훈을 살피다가 팔을 쿡쿡 찔렀다.


  "야, 너어 무슨 생가가냐."


  타오가 은근히 눈을 흘겼다.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온 것처럼 화들짝 놀란 세훈은 왜 그러냐는 듯 타오를 향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타오는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또 금방 몸을 세훈 쪽으로 돌리고 말을 걸었다.


  "야, 나 무어보 꺼 이써."

  "……어 뭐라고?"


  세훈은 귀를 타오에게 갖다 댔다. 타오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말했다.


  "무러보 꺼, 있따쿠."

  "……어? 아, 뭐라는 거야."


  세훈이 진짜 모르겠다는 듯 눈꼬리를 접으며 순진하게 웃으니 타오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책상 위의 핸드폰을 가져와 메신저를 켜고 키패드를 치기 시작했다. 제 딴엔 답답해서 빨리 빨리 치는 거였는데, 외국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남들에겐 신중에 신중을 가해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러볼거가잇다니까 왜 못아라들어!! [오후 3:44]


답답해!!!!! [오후 3:45]


너마음정햇어? [오후 3:46]


  답답하다는 말까지 보고 세훈은 피식 웃으며 네가 말을 못하는 거라고 답을 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도착한 마지막 말을 보고 표정을 서서히 굳혔다. 세훈은 다 썼던 메시지를 뒤로 버튼을 꾸욱 눌러 삭제하곤 화면을 껐다. 그런 세훈을 보고 있던 타오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다 알면서 굳이 확인을 받으려고 했다.


  "아짓또 모탰냐? 뿌흡. 바보야 바버."


  어떻게 이런 놈이 실제로는 자기보다 한 살 많단 말인가. 안 그래도 돌출된 안구가 튀어나올 것처럼 눈꺼풀을 들어 올려 못 생기게 웃는 타오를 세훈은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타오 반대쪽으로 턱을 괴고 몸을 기울이는 걸로 무시했다.


  "너 빨리발이 해라. 이씽 우리 춍강하면 가자나."


  그렇다. 앞으로 4주 정도. 종강을 하고 동아리의 마지막 공연이 끝나면 이씽은 중국으로 돌아간다. 비행기 티켓도 이미 끊어져 있었지만 그 일정을 알고 있는 건 동아리를 같이 하고 있는 세훈과 종인뿐이었다. 안 그래도 돌아오는 주말에 셰어하우스의 식구들에게도 말하겠다고 이씽은 다짐해놓은 상태였다.

  열흘 전, 첫눈이 내렸던 날, 이씽과 가볍게 술을 마시며 세훈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날따라 이씽이 자신을 걱정해주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전하고 싶었다. 몇 달 전 준면에게 예상치 못하게 털어놨을 땐 준면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런 안 좋은 이야기를 해도 될까, 말하면 하늘에 있는 형이 싫어하진 않을까, 따위의 고민은 하나도 하지 않았었다. 준면이 워낙 식구들의 상담을 잘 해주기도 했고, 그의 글 쓰고 책 읽는 점이 워낙 제 형과 비슷해서였던 것 같다. 또 우연이긴 했지만 준면이 사진을 본 상황도 상황이라, 말해도 이상할 게 없는 타이밍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준면이 자신의 이야기도 해줘서 고마웠고, 공감할 거리가 생겨서인지 다른 가족들에게 갖는 느낌과는 조금 달리 의지할 곳처럼 느껴져 좋았다.

  하지만 이씽은 그 얘기를 들으면 준면처럼 적당히 반사하거나 관망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그 사건을 제 것처럼 흡수할 것 같았다.

  아무리 마지막 공연이라도 그렇지, 너무 열심히 연습을 하는 바람에 허리를 다친, 춤에 있어선 언제나 안타까울 정도로 필사적인 그라서, 사람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도 주지도 못하는 그라서, 그럼에도 한 번 주면 아끼지 않고 다 줘 버리는 그라서, 그 모든 게 죽은 제 형과 너무나 닮아서, 이야기를 들으면 이겨내지 못하고 꺾일 것만 같았다.


  “하……. 진짜 머리 아파…….”


  이렇게 어떤 것 ‘하나’에 대해 수백 수천 가지의 생각을 해보는 게 몇 년 만의 일인가. 세훈은 앞머리를 정수리 위로 쓸어 넘겼다가 손을 내려 두 눈을 감쌌다. 타오는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세훈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몇 번 쓸어내려주었다.


  “쳥 안 되면 죤대한테 상탐이라도 해.”


  복잡한 심경에 대해선 타오에겐 이미 말해놓은 상태였다. 세훈은 중국에선 어차피 형 동생 개념이 없다는 점을 노리고 타오에게 호형호제 하지 않았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만큼 통하는 구석이 많았고 잘 맞는 것이었다. 타오는 세훈에게, 세훈은 타오에게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기가 일상다반사였다. 그리고 타오는 준면을 제치고 셰어하우스에서 세훈의 형 이야기를 제일 먼저 알게 된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번 역시 세훈이 타오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았고 타오도 별로 내색은 안 했지만 내심 같이 고민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동성연애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건 타오도 매한가지. 이쪽 일은 세훈이 고민을 시작한 애초부터 종대가 적격인 걸 알고 있었지만 고백을 두 개나 해야 한다는 사실에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나 타오마저 종대에게 상담해보는 걸 권유하자 세훈은 정말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다.

  여차저차 결정은 했으나 이젠 어떻게 말할지가 문제였다. 이씽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헷갈린다는 건 그냥 말할 수 있다고 쳐도, 그 감정을 헷갈리게 만드는 과거의 이야기도 해야만 하는지는 실로 대단한 갈등이었다. 깊고 복잡한 고민은 스스로 나서서 하지 않는 세훈이라서 머리는 과부하로 터질 지경이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는데다가, 이씽이 서는 마지막 무대 연습도 발바닥이 닳도록 하고 있지, 고민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지. 25년 인생 중 최고로 피곤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세훈이었다.










  “죠……, 쭝구구로 도라가요오.”


  담담하게 잘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듣는 식구들이 다들 놀라는 반응이라 이씽은 자기가 말을 잘못한 줄만 알아서 입을 동그랗게 내밀고 게슴츠레한 눈을 굴리며 식구들을 살펴보고만 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준면이었다. 비교적 침착하게 언제냐고 묻는 준면에 이씽은 22일이라고 답했다. 그 때까지 어디 놀러라도 한 번 갔다 오자고 몇몇이 의견을 냈지만 식구들의 스케줄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이씽이 공연을 두 개나 앞두고 있어서 연습에만 매진해야 했다.

  종대는 일단 지금 함께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이씽과 장난을 치고 떠들고 놀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이씽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씽과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밤늦어서야 방으로 돌아왔고 크리스와 통화를 했다.


  “아아- 벌써부터 완전 허전하다……. 응, 알아요. 나도 몇 달 있으면……. 그래도오, 지금은 씽씽이 형 나가는 거 잘 봐주고 싶거든요.”


  크리스와의 통화도 이씽에게 어떤 추억을 만들어줄지에 대한 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하고 아쉬움만 반복하게 했다.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나중엔 이씽과 세훈의 관계도 못 밝히고 끝나는 거 아니냐고 종대가 찡찡거렸는데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종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휙 들었다.


  “아……, 아, 미안해요. 전화하는지 모르고.”


  세훈은 뒷목을 매만지며 눈치를 보곤 그대로 나가려고 했다. 그 표정을 보니 통화 내용을 직접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종대는 다행이라고 마음을 놓으면서도 지금이 기회다 싶어 뒤돌아서는 세훈을 말렸다. 형, 내가 다시 할게요. 마이크에 대고 속삭인 종대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도 있던 것 같아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 왜 온 건데? 아니 일단 나도 물어볼 게 있으니까 내가 먼저 말할게.”


  몸을 일으키고 똑바로 앉은 종대가 세훈에게 제 옆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조금 횡설수설하는 느낌에 세훈은 이 형 뭐냐고 웃음을 터뜨렸다. 형한테 그렇게 웃는 게 아니라며 종대는 세훈의 등을 팡팡 쳤지만 막상 자신이 궁금한 것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난감했다. 세훈에겐 진즉에 이씽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가 두 사람 모두에게 비웃음거리만 된 전적이 있다. 그것도 찬열에게 했던 것처럼 직설적인 것도 아니고 돌려 말한 걸로 말이다. 그래도 이씽이 떠난다는 마당에 한 번 정도 더 비웃음 당하는 건 괜찮겠지, 싶어 종대는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아무렇게나 말하기로 정했다.


  “난 네가 왜 씽씽이 형만 그렇게 잘 해주는지 차암 궁금하다?”


  세훈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 무신경한 표정과 행동이 제 얘기를 제대로 듣기나 한 건지 의심의 여지를 남겼다. 그래서 종대는 스흡 입맛을 다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뭐, 꼭, 씽씽이 형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뜻이 아니라. 너도 애들한테 함 물어봐봐.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걸? 먹을 것도 잘 챙겨줘, 타오랑 형이 뭐 모르겠다고 물어봐도 타오는 무시하면서 형한테는 잘 알려줘, 게임할 때도 챙겨줘, 아 맞다! 우리 여름에 바다 갔을 땐 네가 안 간다는 형도 데려왔잖아! 어? 왜 그러는 거야 정말?”


  세훈은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종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뭘 사람 민망하게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종대가 주먹으로 제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세훈은 와아, 하는 감탄사를 힘없이 내뱉으며 영혼 없는 박수를 쳐댔다.


  “뭐야아, 그런 리액션 말고 뭐라고 말을 해 봐.”

  “아니……, 내가 더 할 말이 없네.”


  세훈의 팔을 잡고 몸을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던 종대가 동작을 멈췄다.


  “왜?”

  “형이 다 얘기했잖아요.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도 그거여서.”


  종대는 서서히 손을 떼고 고개를 갸웃, 입을 비죽거리며 세훈을 쳐다보았다.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자신이 한 말이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종대는 눈을 찌푸린 채 조용한 것이 아무래도 세훈의 말을 이해 못한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씽이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구요. 형이랑 친해지고 나서 나도 날 모르겠거든요.”

  “어어? 내가 왜에- 뭘!”


  그렇다는 건 애정전선이 될 수도 있다는 희소식이다. 종대는 이 기쁘고도 즐거운 일에 입꼬리가 근질근질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세훈이 자기 핑계를 대는 이유는 정말 알 수 없어서 전매특허인 찡찡거림을 발사했다.






  바보, 바보. 겨우 자기 마음 모르겠다는 말을 하려고 종대를 찾아간 건 아니었다. 그것도 문제긴 하지만 세훈에게 더 중요한 건 자기가 이씽을 좋아하면 어떡하느냐, 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종대를 보니,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어졌다. 이러나저러나 종대는 세훈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신나하는 듯 보였지만.

  한 밤이 지난 일요일. 마치 지난 하루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어제와 똑같이 아침거리엔 가루눈이 휘날렸고, 춤 연습을 가는 세 사람은 외투를 여몄다. 춥다는 소리만 의미 없이 되풀이 되고 있던 중 이씽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게 세훈의 눈에 들어왔다. 세훈은 그 모습을 본 즉시 이씽의 팔꿈치 부분을 잡아 세웠다. 이씽이 뒤를 돌며 시선을 세훈의 얼굴이 있는 위로 올리는 그 찰나, 세훈은 제 목도리를 풀러 이씽의 목에 걸었다. 목도리는 끝부분이 세훈의 양쪽 손에 잡혀서 줄넘기 줄처럼 넘어갔고, 이씽의 목에 안착했다.


  “야! 나도 춥다고, 나도!”


  세훈과 이씽이 멈춘 걸 모르고 휘적휘적 앞서 걷던 종인이 저 혼자 떠들고 있는 걸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훈은 종인의 투정에도 이씽에게 걸어준 목도리를 감싸고 묶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안에도 파인 옷 입었는데, 좀 더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이씽보다 세 살이나 어린 주제에 세훈은 귀여운 아이 보듯 이씽을 보며 웃었다. 그러곤 삐쳐서는 다시 걷고 있는 종인에게 달려갔다. 아이, 그럼 형은 내가 패딩 벗어줄까? 세훈이 너스레를 떨며 종인에게 팔짱을 끼었다. 선이 짙은 쌍꺼풀이 눈동자 위에서 헤엄을 치도록 이씽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앞에 가는 종인, 그리고 세훈. 이씽이 둘 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헤, 하고 웃으면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

140220

Posted by Neese
l



W.유쫑





33.첫눈과 로망의 상관관계Ⅱ






  오늘 이씽이 연습을 일찍부터 가는 건, 그에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무대를 주인공으로 장식하게 되었고 그것과 관련해 단장 외 몇몇 부원들과 회의할 게 있던 것이다. 같은 동아리에 몸담고 있는 세훈도 이 사실을 물론 알고 있었다. 저도 오늘 수업만 아니었다면 회의에 나갔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아쉬워서 같이 가주지 못하는 대신 밥을 이미 먹은 이씽에게 제 아침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곤 그 새로운 안무에 대해 이씽과 신나게 떠들고 있는데 종대의 한 마디가 귀를 파고들었다.


  “어……, 눈 온다!”


  보통 때의, 멍하거나, 자신이 말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세훈이었다면 종대의 그 말은 그냥 묻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세훈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고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젖히면 연회색 하늘에서 차가운 것이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세훈과 떠드느라 종대의 말을 듣지 못했던 이씽은 갑자기 멈춘 세훈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누니야!"

  "네, 형! 첫눈이에요!"

  "촛눙?"


  미미하고 작은 눈송이들이었지만 종대는 첫눈이라는 사실에 들떴고, 이씽도 열심히 발음 연습을 하며 한국에서 처음 맞는 첫눈을 느꼈다. 어눌한 발음은 웃음을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종대는 웃으며 발음을 고쳐주었는데 이상하게도 세훈은 고개를 젖힌 채 미동도 없었다. 이씽의 말에 잘 반응해주고 그를 잘 챙겨주는 세훈이었기에 그런 행동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웃고 떠드느라 그 점을 캐치하지 못한 종대와 이씽은 먼저 걸음을 뗐다가 세훈이 뒤따라오지 않는 걸 후에 깨닫고 뒤를 돌아 세훈을 불렀다. 세훈은 얼굴 위에 떨어진 눈송이들을 떨어뜨리려는 건지 잡생각을 지우려는 건지 얼굴을 좌우로 흔들고 걸어갔다. 역까지 가면서는 이씽과 했었던 춤 얘기를 마저 했지만 한 번 시작된 잡생각에 완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완벽하게 행복한 연인은 없다고 생각했다. 떨리고 두근거리고,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세상 모든 걸 가진 것 같고, 그 사람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화학작용의 일환이고 그 기간이 끝나면 좋은 날은 끝일 거라 믿었다. 더 오래 사귀거나 결혼을 해서 같이 사는 건 좋아한다는 감정보단 상대방에게 편해졌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종대는 크리스 얘기를 할 때, 크리스와 연락을 할 때, 크리스에 관련된 모든 것을 할 때, 저리 행복해 보이는지. 세훈은 세상 연인들의 모든 행복을 저 혼자 차지하고 있는 듯한 종대가 얄미워 한소리 했다.


  “아, 이 형 또 연애질 하네.”


  하지만 종대는 세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가에 고운 주름을 만든 채 전철 창밖만 구경할 뿐이었다. 창밖으론 약하지만 아직도 눈이 날리고 있었다. 세훈은 가느다란 눈으로 종대를 내려다보다가 이씽은 뭘 하나 해서 고개를 돌렸다. 이씽은 종대와 종대에게 짜증을 내던 세훈을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때문에 세훈은 이씽과 눈이 마주쳤다. 헤. 세훈을 보고 접히는 이씽의 눈이 그런 소리를 내며 웃는 듯했다. 그러고 그는 다시 종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누군가를 열심히 좋아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이 열심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을 왜 저렇게 흐뭇하게 보고 있는 건지. 부러움도 질투도 한 줌 없어 보이는 이씽의 미소가 세훈은 신기하기만 했다.

  종대가 라디오 방송국이 있는 역에서 내리고 얼마 후, 자리가 나 세훈과 이씽은 앉을 수 있었다. 눈, 그것을 보며 세훈은 또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두 눈엔 초점이 없었다. 이씽은 그토록 멍하니 바깥을 보는 세훈이 눈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 같아 물었다.


  “세후눈 눈 오눈 고 조아?”


  전철을 타기 전에도 눈을 맞으며 눈 내리는 잿빛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세훈이었기에 이씽은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 불특정한 곳을 뚫어지게 향하고 있는 세훈의 눈이 하늘을 닮은 잿빛인 것은 전혀 몰랐다.








  눈은 소복이도 쌓였었다. 18년 동안 봐온 것과 같이 새하얬다.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깨진 유리 파편처럼 반짝반짝 빛났다는 것. 유리 같은 눈은 세훈의 손바닥 위에서 곧바로 녹지 않고 놓인 모양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형 이것 봐! 눈이 안 녹아. 대박 신기하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눈은 세훈의 손바닥 위를 지키고 있었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책가방도 내리지 않은 세훈은 곧장 형의 방으로 달려갔다. 두 손 가득 눈을 들고 있던 세훈이었기에 차마 방문은 열지 못하고 발로 쾅쾅쾅 문을 차면 그의 형이 얌전히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세훈의 손바닥에 고봉으로 담긴 눈을 보고 수긍했다. 정말 예쁘다. 놀라움 가득한 형의 표정이 생기 있어 보여서 세훈은 눈을 가져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뭐해. 불 좀 키고 하지.”


  책상의 스탠드 불빛이 켜져 있고 그 아래 형의 습작 노트가 있는 걸로 봐서 그는 오늘도 시나 소설, 일기 따위를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이 자유롭지 않은 세훈이 팔꿈치로 전등 스위치를 누르려고 하니 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알았다며 손으로 스위치를 눌렀다. 오늘 형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여. 다행이다. 세훈은 형의 웃음에 저도 한 몫 한 것 같아 더욱 기쁜 마음으로 눈을 버리러 갔다.

  세훈보다 두 살 위인 형은 대학생이었지만 학교 집 학교 집밖에 몰라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항상 책을 읽거나 문학 습작을 했다.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고 그만큼 감수성도 풍부했다. 학과도 글 쓰는 것과 관련된 곳이었지만 대학에서 가르치는 문학의 한계를 느끼고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염증을 품었고, 집에 바로바로 오는 것은 그 영향이기도 했다. 네 가족 중 집에 있는 시간이 제일 많은 그는 집안일을 스스로 도맡아 했다. 세훈은 그 날도 형이 차려준 저녁을 먹고 댄스 학원에 갔다. 세훈 앞에 앉아 밥 먹는 걸 지켜보던 형은 돌연 이렇게 말했다.

  세훈아.
  고마워.

  세훈이 뭐가 고맙냐고 물었지만 형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세훈은 우리 형이지만 참 싱겁다며 장난을 쳤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따뜻한 식탁이었다.

  세훈은 학원이 끝나고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슬슬 눈싸움을 하며 집으로 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가로등이 길게 늘어선 길을 걸었다. 어두운 밤에 유일한 빛인 가로등 불빛에 눈이 더욱 반짝거리는 것만 빼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고 얼마 안 있어 정신 사나운 경찰차와 구급차 불빛이 세훈의 눈을 찔렀다. 잔잔한 가로등 불빛과 달리 참 방정맞은 빛이었다.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차들 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세훈의 집 바로 옆 라인에 있었고 호기심이 든 세훈도 그곳으로 발을 돌렸다. 사이렌 소리 때문에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는 묻힌 지 오래였다. 사람들 틈을 파고든 세훈이 이어폰을 빼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웬일이야. 젊은 사람 같은데. 세상에 어떡해. 어쩌다가. 어휴 끔찍해라. 무슨 일이 벌어졌다, 그런 직접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불행하게도 세훈은 이것이 자살 사건이라고 예감할 수 있었다. 추락사는 그 몰골이 굉장히 추해서 사람이 볼 것이 못 된다고 하던데. 세훈은 앞으로 더 갈까 말까 저 광경을 볼까 말까 망설였지만 그의 발걸음은 사고보다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훈은 마침내 인파를 뚫고 현장의 최전방에 도착했고 그 즉시 손에 들고 있던 엠피쓰리를 떨어뜨렸다. 흰 눈을 적신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랐다. 새빨간 피는 시멘트 바닥에서부터 범람하고 있었다. 소복하게 쌓인 새하얗고 반짝거리던 눈은 번지는 피에 의해 침식되고 있었다. 눈 알갱이들을 하나하나씩, 그러나 빠르게 물들이는 그 모습은 세훈으로 하여금 벌레 떼가 제 몸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들게 했다. 사방으로 퍼진 것은 새빨간 피뿐만이 아니었다. 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장기들은 바깥 공기와 만나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세훈에겐 아무런 소리도 닿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 장면을 전부 살피고 나자 장면의 한구석에 실성해서 울부짖고 있는 자신의 부모님들이 보였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주저앉았고, 주저앉으면 시멘트 바닥보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착각이 일었다.








  “세훈. 세후운. 무순 생가캐?”


  답 없이 멍하기만 한 세훈에 이씽은 참지 못하고 결국 세훈의 허벅지를 잡고 살살 흔들었다. 형의 자살. 기억은 눈 내리는 날이면 떠오르고, 어느 때든 한 번 떠올리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세훈은 아까처럼 고개를 옆으로 젓고 제 옆의 이씽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하하. 형은요? 형은 눈 좋아해요?”


  전혀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제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해오는 세훈에 그건 아니었음을 이씽은 알 수 있었다. 어 하야코 예뽀. 부둘부두래. 이씽은 열심히 답해주었지만 세훈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잔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수업을 마친 세훈은 춤 연습에도 도통 집중을 못 했다. 보다 못한 단장이 그렇게 할 거면 집에나 가라고 했고 그 뒤엔 오기로 춤을 췄다. 연습이 끝나고 이씽과 종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세훈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엔 약하고 그치기까지 했다가 오후부터 다시 시작된 눈은 밤이 깊을수록 더 무겁게 쏟아졌다. 그 속에서 세훈에게 애써 웃기란 말로 다할 수 없게 힘든 것이었다.

  오늘은 세훈이 제일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왜 네가 먼저냐고 장난처럼 시비를 걸 법한 종인도 오늘만큼은 먼저 씻을 거냐고 물어봐주기까지 했다. 항상 자신을 챙겨주던 세훈이라 이씽은 오늘은 반대로 세훈을 돌봐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훈이 다 씻고 나왔을 때 술이라도 같이 마셔줘야겠다고 생각해 서둘러 2층 욕실로 올라갔다. 속옷과 수건을 챙겨 방에서 나오는데 화장실에서 막 나온 종대를 마주쳤다. 종대는 늘 그렇듯 반갑게 이씽을 맞아주고 이런 저런 말을 걸어왔다. 종대가 묻는 말에 답을 하던 이씽은 다 좋았지만 오늘따라 세훈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조금 다른 세상, 있눈 고 가타소……. 걱쫑이가 많아 보여쏘.”

  “엥? 세훈이가요? 와- 상상이 안 되는데.”

  “웅. 나도 구런 모습 초음 봐찌.”


  종대는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이야기는 결론 없이 왜 그럴까하는 의문만 반복되다가 끝났다. 종대가 방에 들어가는 걸 본 이씽은 자기도 얼른 씻어야겠다는 게 생각나 욕실로 총총 들어갔다.




  세훈은 머리도 채 말리지 않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긴 했는데 쌓인 메신저에 답장할 기분도 아니고 게임도 하고 싶지 않아서 화면 조명이 꺼질 때까지 들고만 있었다. 조명이 꺼진 핸드폰은 팔을 투욱 내려 다리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형이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다. 몇 년 동안 그 끔찍한 사고 장면이 꿈에 나타나는 횟수도 줄어들어 괜찮아지고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올해는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 때문인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세훈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준면이 들어왔다. 세훈은 누운 채로 고개를 젖혀 준면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일어나서 말할 기운도 없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걸 알아들은 건지 준면은 일어나지 말라며 방에 들어왔고 세훈의 다리가 있는 쪽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준면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헛기침을 하고 뒷목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냐?”


  세훈이 준면의 과거를 알고 있듯이 준면도 세훈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계기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었다. 때는 준면이 엄마 역할을 자처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으며, 세훈이 셰어하우스 일원이 된 지 1년 정도 되었을 즈음이었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겼던 옷들이 배달되었는데 어떤 옷 한 벌의 주머니에서 안 빼놓았던 머니클립도 함께 오게 되었다. 옷이 여러 벌 있었기에 준면은 누구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머니클립을 열었다. 잘 들고 다니지 않는 건지 지폐도 한 장 없었고 낡은 영수증들과 정체불명의 적립카드들, 사진 한 장만이 끼어 있을 뿐이었다. 사진엔 지금보다 훨씬 어린 모습이라 바로 알아보지 못한 세훈과 그와 닮은 남자가 웃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꽃다발과 앨범처럼 생긴 물건으로 준면은 이것이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며 모르는 남자는 세훈의 형이라고 짐작했다.


  “세훈이 너 형 있더라?”


  그 날 밤, 준면은 세훈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머니클립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색이 되는 세훈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사진에선 친해 보이던데, 그 후로 사이가 틀어졌다면 사진을 넣고 다니지 않았을 텐데. 세훈이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뭔가 안 좋은 게 연관되어 있을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니, 누구 건지 보려고 열어 봤는데, 사, 사진이 맨 앞에 있길래……. 형이 실수했지, 미안해.”


  세훈은 계속 표정을 굳힌 채 멍하니 있는 게 준면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준면의 미안함과 무안함은 더 커져만 갔다. 그러다가 세훈이 천천히 준면에게 시선을 옮겼는데 삼백안인 눈 때문에 준면은 더 흠칫하고 말았다.


  “상담……, 은 아니고. 뭐 하나 털어놔도 돼요?”


  준면이 상담거리가 있으면 털어놓으라고 했을 땐 그게 더 부담될 수도 있다고 무시했던 세훈이다. 뜻밖의 말에 준면은 놀랐지만 한편으론 세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게 기뻐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은 얘긴 아니에요. 세훈은 기대에 찬 게 빤히 보이는 준면에게 피식 웃었다.


  “우리 형, 죽었어요.”


  준면은 그 날 그 때 세훈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말의 내용 때문에 세훈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일화를 읊는 세훈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해서 세훈이 형의 자살이란 그림자에서 숨 쉴 수 있을 정도는 벗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준면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자기도 형이 하나 있는데 동성애자여서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다고. 자기 형도 자살시도를 했었다고. 시도라는 것으로도 충격이 컸는데,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준면은 세훈에게 그리 말했다.

  자신의 일일 때엔 상처가 아물고 바래져 이젠 담담한 것일지 몰라도 그 이야기가 남의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때가 있기 마련이다. 별 문제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세훈은 그만큼의 이야기를 돌려 들려주는 준면이 놀랍기도 했고 고마운 한편 미안하기도 했다. 그 후, 둘 다 ‘그 일’에 대해 다시 언급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날을 기점으로 두 사람에겐 여타 식구들과는 다른, 유대감이나 공감대 따위 같은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뭘 신경을 쓰고 그래요, 새삼스럽게.”


  세훈의 힘없는 웃음이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아지기 위해 말하는 건지, '괜찮다‘는 항상 여지를 남기는 말이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준면은 어색하게나마 세훈을 따라 웃었다.


  “잘래요. 피곤하다.”


  세훈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준면은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갔는데 동시에 다른 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세훈에게 들렸다. 세훈은 당연히 종인이겠거니 하고 그대로 계속 잠을 청하려고 했다.


  “형, 우리 얼른 불 끄자.”


  세훈이 아예 등이 보이도록 돌아누우며 말했다.


  “……오오, 알아쏘. 잘 자, 세후운.”


  세상에, 들어온 이가 이씽이었나보다. 세훈은 벌떡도 아니고 펄떡 일어났다. 불을 끄고 나가려던 이씽이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일어서다가 2층 침대에 머리를 박은 세훈이 몸을 움츠리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푸훕……. 괜차나?”


  굉장히 아파 보이는데 왜 웃음이 나는지. 그나마 걱정되는 마음으로 푸하하 웃는 것만은 참고 있는 이씽이었다.


  “아아- 형, 사람 아픈데 그렇게 웃기에요. 아아아아…….”


  이씽은 투정을 부리는 세훈이 귀여워 소리 없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훈이 좀 진정되자 잘 자라고 인사를 하고 불을 끄고 나오려는데 어느 새 걸어 나온 세훈이 이씽이 밖에서 잡은 문고리를 안에서 잡아당겨 열었다. 이씽은 놀랄 때면 그렇듯 입술을 바깥으로 약간 내민 채로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맥주 한 캔 하죠. 콜?”

  “오? 노 안 자?”

  “잠은 술 마시고 자도 되는 거고.”


  이씽은 자신을 앞질러 가는 세훈을 졸졸 따라갔고 세훈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둘은 예전에 같이 술을 마셨던 대로 자연스럽게 베란다로 나갔다가 벌벌 떨며 안으로 들어왔다. 물기가 남아 있던 머리칼이 금방 얼어서 딱딱해진 것 같았다. 거실이든 종인과 같이 쓰는 세훈의 방이든 둘만 있는 건 힘들 것 같아 술은 이씽의 방에서 마시기로 했다. 이씽과 세훈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고 낄낄거리며 2층 계단을 올랐다. 그 소리를 들은 종대가 방에서 나와 둘을 맞아주었다.


  “둘이서 한밤에 데이트에요? 야 오세훈 너 우리 형한테 잘 해라아.”

  “나처럼 잘 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세훈이 얄밉게 대꾸했지만 종대는 재밌다고 웃고만 있는 이씽을 봐서라도 참기로 했다. 또 이씽의 걱정과 다르게 잘 웃고 있는 세훈이라 뭔진 몰라도 잘 풀린 것 같았고 말이다. 그래서 순순히 계단 아래쪽 이씽의 방으로 들어가는 둘에게 잘 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둘이 엄청 친해졌다. 보기 좋게.”


  종대는 뒤돌아서며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이씽은 준면과 교대로 세훈을 보러 들어가며 그 깊은 한숨이며 무거운 분위기를 알아차린 참이었다. 그래서 술도 이야기도 나중에 해도 좋으니, 일단은 쉬라는 마음에서 인사를 하고 나온 거였는데 반대로 세훈이 잡아서 깜짝 놀랐다. 그것도 하루 종일 나사 하나 빠진 것 같던 아이가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이씽은 세훈의 그 모든 모습의 원인이 궁금했고 때문에 술이 함께 있다는 건 물어보기 더 쉬운 조건으로 느껴졌다.


  “세훈, 군데 이제 괜차나?”

  “네? 뭐가요?”


  이씽의 돌발 질문에 마시던 맥주를 입가에 묻힌 세훈이 손등으로 닦아내며 되물었다. 이씽은 책상 위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조금 떼어 세훈에게 건넸다.


  “오눌 께속 이상해 보여쏘. 오디 아파떤 고야?”


  아아. 세훈은 이씽이 준 휴지로 손등과 입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눈 때문에요, 지금도 내리고 있는 눈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이씽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남의 생각 따위야 백날 생각해봤자 알게 될 리가 없으니까.


  “아유, 아프긴요. 아픈데 술을 어떻게 먹나. 나야말로 형한테 미안했어요. 아까 아침에도 형 얘기하는데 내가 정신 팔려 있어서.”

  “에이, 모가 미아내. 노 아푼 고 아니면 돼쏘.”


  이씽은 손사래를 치곤 술이나 계속 마시자며 건배를 청했다. 캬 맛 조타. 세훈을 걱정하느라 농담 하나 잘 못 던지던 이씽은 비로소 안심이 된 건지 편하게 말하고 웃기 시작했다. 좀 더 무거운 이야기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한 것이었다.

  한편 이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흔들거리니 세훈은 푸하하 웃었지만 마음 속 한 편의 무거운 생각을 완전히 지우진 못하고 있었다. 진심이면 곤란해. 세훈의 안에서 경보가 울렸다.










-
31편 첫눈과 로망의 상관관계Ⅰ과 같은 시간적 배경

140217

Posted by Neese
l



W.유쫑




32.역관광 ver.김 형제들






  “무슨 첫눈 온 지 일주일 만에 함박눈이래요.”

  “이 정도면 폭설인데?”


  집에 남아 있던 종대와 준면이 테라스 창밖을 보고 말했다. 흩날리는 눈발은 안개처럼 공중을 뒤덮고 있었다. 아직 11월인데도 이렇게 쏟아지는 눈에 둘은 날씨가 정말 미쳤나 보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장을 보러 가겠다는 준면의 의지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처럼 굳건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종대를 데리고서.

  어차피 준면과 장을 보러 가봤자 하는 일은 짐꾼인 게 다였다.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 날 스케줄이 없어서 안심하고 있던 종대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발끈했다.


  “왜 날 데리고 가요?”

  “김 형제잖아.”


  허, 참. 김 형제라니. 종대는 그 간결하기 그지없는 이유에 반박하지 못했다. 김 형제들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신이 결성한 것이었으니까.


  “아니, 왜 하필 오늘 가는데요오.”

  “왜긴. 먹을 게 없으니까 그렇지.”

  “정말 진짜로 오늘 가야 돼요?”

  “반.드.시 오늘 가야 돼. 너 밥 먹기 싫으면 뭐, 가지 말든가.”


  먹는 걸로 치사하게 굴지 말라고 했거늘. 어쨌든 먹는 것에 약한 종대는 그 협박에 못 이겨 패딩을 걸치고 준면을 따라나섰다. 탈 기회가 많지 않은 준면의 페르쉐에 타는 건 좋았지만 추운 날씨 때문에 꽁꽁 얼어 있는 시트에 종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트에 도착하자 준면은 능숙하게 주차를 하고 매장으로 들어가, 능숙하게 무빙워크를 타고 맨 아래층 식품관으로 내려갔고, 능숙하게 카트 손잡이에 100원을 넣어 카트를 꺼냈다. 반면 마트라는 장소와 그곳에 익숙한 준면이 낯선 종대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직원에게 똑같이 인사를 하는 어리숙함을 보였다. 가족들이 먹고 싶다고 한 것, 해달라고 한 것의 재료 목록과 세제나 휴지 등의 세간들을 확인하며 카트 안에 착착 식료품을 담는 준면은 단연 최고의 살림꾼이었다. 종대는 준면을 따라다니며 시식코너의 음식들로 배를 채웠기에 집에서 불평하던 것과 달리 따라온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카트 하나를 다 채우고 계산을 하고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다시 무빙워크에 올랐는데 준면이 잠깐 1층에 들리자며 중간에 내렸다. 종대는 카트를 밀며 얌전히 준면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준면이 예의 능숙한 걸음으로 들어간 곳은 당황스럽고 황당하게도 화장품 매장이었다.


  “이거 다 형꺼에요?”


  남성용 스킨이야 무난하다지만 영양크림과 한 손 가득 쥐어드는 마스크팩은 무어라 말인가. 준면의 뒤를 따라다니며 화장품 쇼핑을 구경하던 종대가 헛웃으며 물었다. 준면은 손 한가득 들려 있던 화장품들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뭘 물어, 당연하지. 남자도 관리가 생명이다.”


  그 말에 바코드를 찍고 있던 점원이 입을 꾹 다물며 웃음을 참았다. 남자 둘이 장을 본 걸로 모자라 화장품까지 사러 들어오는 종대와 준면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지켜보던 점원이었기에 그 웃음 덕에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종대는 ‘미남은 가꾸기 나름’이라며 피부 관리에 신경을 쓰는 크리스가 생각나, 준면 때문에 터졌던 실소를 부드러운 미소로 바꿔놓고 있었다. 하지만 계산이 끝나고 돌아갈 때는, 역시 우리 형 백옥 같은 피부가 괜히 유지되는 게 아니라며 준면의 작은 엉덩이를 톡톡 쳐주어서 점원의 의심이 다시금 피어나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폭설 같았던 눈이 내린 이후 날은 훨씬 차졌다. 그럼에도 불타는 금요일 밤, 열기 가득한 공연을 끝낸 종대는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꽂아 넣고 장난삼아 입김까지 후후 불어가며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오늘따라 따뜻하게 느껴지는 셰어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손으로 진동을 보냈다. 이어폰으로 들리는 알림음이 메신저가 왔을 때와 다른 것이라 종대는 손 시린 걸 무릅쓰고 핸드폰을 꺼냈다. 알림음의 정체는 문자메시지였다.


  민석이형
  종대 오는길에 ㅋㄷ좀!^^


  ㅋㄷ? 이 뭐지? 카드? ㅋㄷ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종대는 메신저가 아니라 문자로 보낸 걸 보면 꽤 급한 용무일 거라는 판단에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루한의 것이었다.


  “루한이 형, 민석이 형이 키읔 디귿을 사다달라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종대, 너 다 큰 남자가 그것도 몰라서 어떡하냐. 뭐겠어.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거지.

  “헐? 아, 뭐야.”


  이 형이 장난하시나. 종대는 허탈한 듯 웃으며 그 말은 삼켰다.


  “근데 저 어차피 집 앞이에요.”

  -아아! 좀 사다주라. 김 형제잖아.


  루한은 앙탈, 애교는 확실히 아닌 떼씀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종대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수화기를 귀에서 뗐다. 머릿속에선 같은 말이 맴돌았다. 김 형제잖아. 김 형제잖아. 종대는 할 수 없이 그러마고 답했다. 추운 길을 되돌아가는 걸음을 떼긴 쉽지 않았다. 그놈의 김 형제가 뭔지, 그 이름을 생각해낸 종대는 자신에게 온갖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종인의 비밀을 캐보려다가 형들 심부름이나 계속 떠맡고 이게 무슨 봉변인가. 게다가 김 형제를 결성한 목적도 긍정적으로 달성하지도 못했다.


  “이 김종이이인!! 경수야아!!”


  인적이 드문 밤의 골목에서 종대는 당사자들에게 들리지 않는 포효를 울부짖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 주에 경수를 만났을 때 흠씬 두들겨 주고 오기나 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추위를 뚫고 갔다 온 심부름에 종대는 자랑스럽게 민석 앞에 편의점 봉지를 내밀었다. 그런데 방금 씻고 나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는 민석은 봉지를 내려다보며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종대가 한 번 더 봉지를 앞으로 흔들며 안 받냐고 물으니 급기야는 이게 뭐냐고 묻는 민석이다.


  “형이 사다달라고 했잖아요.”


  민석은 수수께끼 같은 종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일단은 봉지를 받고 봤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봉지 입구를 휙 잡아 봉하곤 몇 초 뒤 터질 폭탄이라도 되는 냥 종대에게 떠넘겼다.


  “이게 뭐야!”

  “뭐긴요. 안전한 성생활을 위한…….”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목소리 톤 하나 안 낮추고 당당하게 말하는 종대에 민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입을 막았다. 하지만 거실에 있던 식구들에겐 막았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 다 들린 터. 민석은 식구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일 틈도 없이 종대의 팔을 잡아당겨 방으로 데려갔다.


  “야! 너 죽을래?”


  민석은 종대가 아닌 루한에게 소리쳤다. 아무 것도 몰라요, 라는 듯한 순진한 얼굴로 민석을 보던 루한은 그 뒤의 종대를 보곤 상황을 읽었다. 시치미를 떼려고 그 표정을 계속 유지한 채 민석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건 역효과가 나 민석의 주먹을 불러 일으켰다. 민석은 종대의 손에 들려 있던 봉지를 홱 잡아채곤 쿵쾅쿵쾅 걸어가 그걸로 루한을 때리기 시작했다. 종대는 제가 더 있어 봤자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아 가보겠다 통보하고 방을 나왔다. 루한은 민석에게 맞으면서도 헤헤 웃었고 종대에게 잘 쓰겠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자기가 안 시켰다면서 가져가긴 왜 가져가는 거지……?”


  종대는 닫힌 방문 앞에 가만히 서서 중얼거렸다. 민석의 반응을 보면 정말 모르고 있던 것 같지만 어쨌든 부부는 부부고, 남자는 남자라고 하기 싫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푸흐 웃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종대는 깜빡했던 말이 떠올라 뒷걸음질 쳐 민석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향 좋…….”


  방문이 닫힐 때만 해도 의자에 앉아 있던 루한을 봉투와 주먹으로 때리고 있던 민석은 다시 방문이 열렸을 땐 루한의 허벅지 위에 앉아 키스를 하고 있었다. 루한의 손은 민석의 티셔츠 뒤쪽으로 들어가 척추를 따라 움푹 들어간 엉덩이 위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들리는 종대의 목소리에 입술은 바로 떼었다 해도 민석이 루한의 다리 위에서 일어나거나 루한이 민석의 옷 안에서 손을 뺄 여유는 없었다.


  “……아하는지 몰라서 여러 개 사왔다구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반면 종대는 여유 넘치게 손을 흔들며 인사까지 해주었다. 루한의 음흉한 계획을 모르던 민석에겐 좋은 시간만은 아닐지도 몰랐지만, 결국엔 콘돔을 가져가고 루한 위에 앉아 키스를 하는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으니 크게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










  개운하게 씻고 나온 종대는 준면과 장을 보러 갔던 날 한 장 얻었던 마스크팩을 붙이고 크리스와 메신저를 했다. 피부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랑하려고 인증샷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10분 후, 시트를 떼어내고선 오늘도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눌렀다.


  -팩 끝났어?

  “네. 완전 웃기다. 별 걸 다하네.”

  -아냐. 남자도 관리를 해줘야지.


  크리스는 준면 못지 않게 피부 관리에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종대와 떨어져 살기 전부터 세수 잘 하고 수분크림 꼭 바르라고 일렀고, 떨어져 살고 나서도 통화로 종종 잘 발랐냐고 물었다. 특히 날씨가 추워지며 건조해진 이후로는 더 자주.


  -그리고 우리 애인 예뻐지면 나야 좋지.

  “아, 예쁘다고 하지 말라니까.”

  -알았어. 멋있어지면.

  “아녜요. 근데 형이 이쁘다는 건 괜찮아요. 형 감탄사니까.”


  종대는 유리창으로 비치는 통화하는 제 모습이 말 그대로 ‘예쁘게’ 보이는 것 같아 조금 놀랐다. 고작 10분 붙여놨던 마스크팩 때문은 아니리라. 사람이 웃고 행복해하는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임을 종대는 새삼 느꼈다.


  “맞다, 형. 내가 오늘은 루한이 형, 아니, 민석이 형 심부름을 했거든요? 그것두 집 앞까지 왔는데 문자 와서 갑자기. 콘돔을 사다달라는 거야. 그쵸, 그런 건 부부끼리 해결을 해야지. 암튼 갔다 왔어요. 김 형제라고 그러니깐 안 갈 수가 없었다구요.”


  종대는 다시 한 번 김 형제를 고안해 낸 자신을 원망했다.


  “암튼 사 와서 민석이 형한테 줬는데, 형이 진짜 암것도 모르는 얼굴인 거예요. 알고 보니까, 루한이 형이 민석이 형 핸드폰으로 시킨 거였어요. 응큼한 북경 김 씨 같으니라고.”

  -응큼하대. 아하하하, 진짜 웃겨 종대. 그래서 어떻게 됐어?

  “민석이 형이 루한이 형 마악 때렸어요. 근데 내가 향 어떤 거 좋아할지 몰라서 여러 개 샀다 하려고 다시 방에 갔는데, 아니 고 사이에 물고 빨고 하고 있더라구요.”

  -푸하하! 아, 대박이다, 진짜. 뜨거운 신혼이야.

  “정말이에요. 안 그렇게 생겨선 스테미나 짱인가 봐요.”


  어째서인지 루한과 민석의 얘기는 나오기만 하면 야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루한이 아래에 수건만 걸친 민석을 보고 코피를 뿜었을 때며, 나중에 두 사람이 부부인 걸 알고 나서 그 문제를 짚고 넘어갔을 때도 그랬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크리스와 종대의 일로도 넘어갔다. 할 말이 있는 듯하면서 헛기침만 연신 해대던 크리스가 자기도 괜찮지 않냐고 물은 것이었다. 크리스가 종대의 말을 듣고 호탕하게 웃었던 것처럼 이번엔 종대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다 좋죠, 당연히. 근데…….”

  -……근데? 뭐 안 좋은 거 있어?

  “아뇨, 안 좋은 거 없다니까.”


  종대는 입술을 깨물고 답하길 망설였다. 말할 생각에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인데, 눈동자를 굴리다가 마주친 유리창의 제 모습은 변함없이 행복해 보였다. 생각만으로도 좋다는 건가, 싶어서 우스웠다. 그래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웃곤 말했다. 너무 크잖아요. 라고, 조금의 앙탈을 부리면서.










-

140212

Posted by Neese
l



W.유쫑




31.첫눈과 로망의 상관관계Ⅰ











  아아아아, 늦었다, 늦었어.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늦었다 소리를 연신 해대는 종대는 겉옷에 팔을 집어넣으며 계단을 두두두두 내려왔다. 있는 호들갑 없는 호들갑 다 떨며 내려왔지만 감사하게도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1층에 발을 디디면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방문을 벌컥 열고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처럼 튀어나온 세훈은 미끄러지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씽씽이 형은 어디 가요?”


  세훈 때문에 한바탕 웃은 종대가 현관에 서 있던 이씽을 보고 물었다.


  “웅, 나 욘습 가료구.”

  “어 그럼 같이 가요.”

  “아, 형 옷이나 제대로 입어요.”


  종대가 종종걸음으로 현관으로 가니 중심을 잡아 넘어지진 않은 세훈이 뒤따르며 말했다. 종대는 그 제야 자신이 겉옷 왼팔 부분에 오른팔을 집어넣고 왼팔 부분을 계속 찾으려고 했던 걸 깨달았다. 그러는 세훈도 벨트도 채 못 잠그고 한쪽 어깨에 걸친 가방 문이 열려 있어 꽤 볼 만 했지만.

  세훈이 1교시가 있는 월요일에 허겁지겁하는 건 이제 일상다반사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세훈의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어놨던 준면은 적당히 식은 구워진 식빵 한 쪽과 그냥 식빵 한 쪽을 들고 현관으로 쫓아 나왔다.


  “종대 나가는 건 몰라서 준비 못 했네. 이거라도 먹어.”

  “고맙습니다. 형 근데 저 형 요구르트도 하나만 주면 안 돼요? 야 오세훈! 같이 가자고오!”


  준면은 역시 식탐 많은 종대라는 듯 씨익 웃으며 하루에 하나씩 배달되는 제 몫의 요구르트를 갖다 주었다. 겉옷을 고쳐 입으랴 신발을 제대로 신으랴 요구르트를 받으랴 바쁜 종대가 먼저 나간 세훈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마음만 급한 세훈은 책가방도 안 고쳐 메고 이씽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갚을게요, 마마.”

  “종따! 내 엄마라닉하!”


  요구르트를 받고 허겁지겁 나가는 종대에게 마침 방에서 나온 타오가 소리쳤다. 어이구 하여튼 오세훈이나 황쯔타오나, 둘이 친구여서 얄미운 짓도 똑같이 한다고 종대는 궁시렁거렸다. 그래도 앞서가다가 제가 뛰어서 쫓아오는 걸 본 이씽이 세훈을 말려서 더한 수고는 덜 수 있었다.


  연습을 갈 때나 일을 갈 때나 거의 혼자 다니는 역까지의 길은 오랜만에 식구들과 함께 하니 마치 처음 온 것처럼 색다른 기분이 들게 했다. 특별한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아침엔 정말 춥다, 빵 맛있다, 월요일 정말 싫다 등등 가벼운 이야기들만이 오갔을 뿐이었다.

  게다가 종대에겐 흥밋거리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세훈과 이씽, 둘을 관찰하는 것. 난 누굴 욜쉬미 좋아할 수가 없거둔. 한 달 전 즈음, 둘의 사이를 조금 수상하게 여기던 자신에게 이씽이 했던 말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해 이씽의 마음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세훈이 이씽과 다른 식구들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확실한 건 분명해서 두고 봐야 할 가치가 있었다.


  “형 밥 먹었어요?”

  “웅. 나눈 노네보다 일찍 일어나서 다아 씻고 밥 머고쏘.”

  “그럼 쫌만 먹지 뭐.”


  지금도 세훈은 구태여 이씽에게 빵을 떼어 나눠주었다. 그럼에도 좋아해서 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은 게, 조심스러움이 전혀 없던 것이다. 여태까지 종대가 셰어하우스에서 의심을 했던 두 커플이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그 후론 둘이 오늘 이씽이 춤 연습을 일찍 가야 하는 새 안무에 대해 이야기 하느라 종대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크리스와 아침인사나 해야겠다며 핸드폰을 꺼내드는데 까만 액정에 새하얀 무언가가 떨어졌다. 금방 형체를 잃고 물로 변하는 그것에 종대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어……, 눈 온다!”


  한 송이 두 송이 내리기 시작한 눈은 종대의 눈 밑과 콧잔등에도 내려앉았다. 그리고 종대를 따라 고개를 젖힌 이씽과 세훈에게도. 첫눈이라는 사실에 들떠 종대는 눈송이송이가 내려앉은 핸드폰 액정을 겉옷 소매로 스윽 닦아내고 키패드를 쳤다.


[오전 8:25] 형 첫눈와요!!


  출근 중인지 크리스에게선 곧장 답이 오지 않았다. 종대는 일단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요구르트를 쪽쪽 빨며 자신과 관련이 없는 춤 얘기에도 맞장구를 쳐주며 역까지 갔다. 전철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크리스에게 답장이 와 있었다.


웬일? 이시간에깨어있고 [오전 8:32]


[오전 8:32] ㅡㅡ


[오전 8:32] 라됴가요


오 아침부터 종대목소리 들을수잇겟다 ㅎㅎ [오전 8:35]


[오전 8:36] 회사에서 틀어놔도돼요?ㅋㅋㅋㅋ


ㅇ 사장특권ㅋ [오전 8:36]


  붐비는 전철이었지만 종대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말려 올라간 입가와 눈가에 진 주름을 본 세훈이 이 형 또 연애질 한다며 비아냥거려도 종대는 가볍게 무시해주곤 그 곱게 접힌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에 첫눈이라는 이름답게 살포시 내리는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풍경이 그렇게 한가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없었다.




  종대가 출연하기로 한 코너는 9시 반부터 시작되는 2부, 3부였다. 머리 매만지는 것과 아침밥을 포기한 덕분에 늦지도 않았고 크리스에게서 방송 잘 하라는 문자가 와서 일을 잘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좋은 예감대로 멘트도 실수 한 번 없이 재미있게 술술 잘 풀렸다. 2부와 3부 중간의 CM 시간에 종대는 늘 그렇듯 무의식중에 핸드폰을 만졌는데, 메신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자 몇 시간 내내 머금고 있던 웃음기가 가셨다.


  경수
라디오 하고 있는 거야? [오전 9:36]


  시간을 보아하니 종대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럼 처음부터 이 방송을 듣고 있었던 걸까. 하긴 제가 나올 걸 알고 라디오를 들었을 리 없다. 경수가 원래 듣는 라디오에 종대가 패널로 출연해서 우연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게 더 일리 있을 것이었다.


  “종대 씨, 들어갈게요.”

  “아, 네!”


  책상 위의 핸드폰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종대에게 DJ가 말했다. 종대는 이따 연락하겠다는 짧은 답장을 보내고 대본에서 다음 할 대사를 훑었다. 열 시를 알리는 소리가 부스에, 그리고 경수가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 울렸다.










  “어! 여기.”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던 경수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종대에게 손을 올려 보였다. 방송이 끝나고 종대는 경수에게 전화를 했고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고 경수 학교 근처의 중국집으로 왔다. 어디서 만날까 하는 말에 종대가 학생은 공부해야 하니 사회인인 자기가 가겠다는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린 것이다. 가볍게 안부를 묻던 둘은 음식이 나오자 먼저 주린 배를 채우고 보자는 듯 먹는 데에 집중했다. 면 종류인 짜장면과 짬뽕을 먼저 다 먹은 뒤 남은 탕수육을 하나씩 집어먹으며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준면이 형이 너 걱정 많이 해. 혼자 사는데 밥은 잘 챙겨 먹나, 건강한가. 아무래도 혼자 살면 건강 같은 걸 잘 못 챙기게 되잖아.”


  열심히 먹으면서 열심히 얘기하는 종대 때문에 경수는 풋 웃었다. 걱정 한가득인 엄마 같은 준면도 떠올랐고 말이다.


  “네가 보기엔 어때.”

  “응?”

  “나 어떠냐고. 건강한 거 같애?”


  종대는 탕수육을 우물거리며 경수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단? 삐쩍 곯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네.”


  그 말에 경수도 말을 한 종대도 웃음이 터졌다. 대학교 근처의 식당답게 점심을 먹는 대학생들로 복작거리던 그곳의 시선이 두 남자에게 쏠렸고 둘은 간신히 웃음소리를 줄였다. 탕수육 그릇이 빌 때까지 종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네 방에서 지금은 타오가 지내고 있다, 겁이 많아서 계단 아래 방이 무섭다고 너 나가고 얼마 안 가서 타오가 바로 쓰게 됐다, 그런데 추석에 준면이 형 아버님이 오셔서 그 방을 써서 타오가 쫓겨났다, 준면이 실은 깊은 사연이 있는 엄청난 작가였다, 이씽도 이제 이 집에 많이 적응한 것 같다, 이씽의 생일 파티 때 그를 놀린 게 무척 재밌었다, 세훈이 이씽을 잘 따른다, 사실은 타오가 세훈보다 한 살 많은 걸 알고 있었냐. 근 두 달간의 일들이 거의 빠짐없이 종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하지만 식구들 각각의 이야기에서 백현, 찬열, 민석, 루한의 비중은 극히 적었다. 특히 민석과 루한이 부부 관계였다는 게 밝혀진 엄청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경수를 신경 쓰는 종대 나름의 배려의 방법이었다. 일단은 자기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이렇게 밖에서 둘이 만나 밥을 먹어주는 것도 종대에겐 뜻 깊은 일로 다가왔다. 그래서 경수가 꺼려하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특히, 종인의 이야기는 아예 입에 담지를 않았다.

  그토록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일까. 종대는 반이 넘게 남았던 탕수육을 저 혼자 거의 다 먹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경수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것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어서, 제 말을 가볍게 듣고 탕수육은 잘 먹지도 못했다는 걸 종대는 모르고 있었다. 또 경수는 종대가 찬열과 백현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챘고 그게 내심 미안했다. 이야기가 잠시 끊겼을 때, 경수는 줄곧 하고팠던 말을 드디어 입에 담았다.


  “종인인 어때?”


  경수의 짧은 한 마디에 종대는 음식이 나온 후로 먹으랴 떠들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을 처음으로 멈췄다. 경수는 종대의 눈을 피하며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 네가, 말을 안 하길래. 궁금해서.”


  멍해져 있던 종대는 입안에 있던 음식을 씹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그래, 뭐, 궁금할 수도 있지. 같이 살을 부대끼고 살던 식구, 가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그런 뒤, 종인의 이야기를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내색 없이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는 그럭저럭 잘 있다. 이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춤만으로 돈을 벌고 있다. 무엇보다 해주고픈 말은 종인이 이제야 경수의 그늘에서 벗어나 좀 괜찮아진 것 같다는 것이었으나 그 대신 종대는 다른 말을 택했다.


  “염색을 두 번이나 했어. 것두 첫 번째는 탈색이어서 깜짝 놀랐다 진짜.”


  시련을 당한 사람들이 당연한 절차처럼 머리 모양을 바꾸듯 종인 역시 그러했다. 종대는 그 사실을 경수가 불편해 할까봐 장난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시선을 피하고 있던 경수는 어느 새 종대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다시 바꿨구나…….”

  “어? 너 종인이 머리 바꾼 거 알고 있었어?”


  이번엔 경수가 대답을 망설였다. 종대가 대답을 종용하듯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경수는 다시 눈을 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어어……. 길 지나가다가, 공연하는 거 봤어.”

  “아……, 그래? 지금은 갈색이야. 더 어려 보이는 것 같더라.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고.”


  종대는 별 거 아닌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종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만이 존재했던 경수에게 호들갑을 떨어 불편한 감정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었다. 적당히 선을 긋고 어디까지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는 건지 생각하는 것은.

  다행히 종대의 말과 말투 행동 모든 것은 효과가 있는 듯했다. 경수는 지금 차분히, 속으로 종인을 만났던, 정확히는 봤던 그 날을 회상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그를 봤다는 것 이외엔 아무 일도 없었다. 춤을 추는 종인을 보며 경수는 예전에 종인의 춤을 처음 보러 갔을 때를 떠올렸었다. 하지만 그 때의 종인과 이번에 본 종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춤에 대해선 문외한인 경수지만, 그 때의 종인이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백조 같았다면, 이번의 종인은 독기를 가득 품은 필사적인 흑조 같았다. 전혀 다른 안무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경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를 바꾼 것이 자신일까, 하는 궁금증 섞인 염려가 들었다.

  그 때의 그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괴리감? 안타까움? 속상함? 자기도 모르게 계속 종인을 지켜보고 있던 경수는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지자 정신이 들었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며 그 기분들을 떨쳐내려고 했다.

  튀지 않고 무난한 갈색이라. 어쩌면 그가 머리색을 바꾼 원인은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약에, 혹시라도 만약에,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면 갈색으로 바뀌어 다행이라고 경수는 생각했다. 마음을 대변하는 색이 수수해졌다는 건 그 마음이 조금은 잔잔해졌다는 걸 뜻할 테니.


  “어? 눈이다.”


  사색에 빠져 있던 경수는 종대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에선 하얗고 커다란 눈송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이, 그리고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첫눈이네.”

  “땡! 틀렸어. 아까 아침에도 내렸거든.”


  경수와 종대는 서로를 보며 한 번 스윽 웃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 하면 백현이랑 찬열이를 빼놓을 수 없는데.”


  풍경을 감상하던 종대는 여태까지 애쓴 것이 무색하게 두 친구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종대는 경수가 왜 그러냐고 물어볼 때서야 아차 싶었다.


  “아……, 얘기해도 되나.”


  종대의 손이 어색하게 앞머리를 매만졌다. 영문을 모르던 경수는 그 커다란 눈이 튀어나오도록 크게 뜨고 있었지만 종대가 망설이는 이유를 이내 알아차리곤 괜찮다고 했다. 괜찮으니, 듣고 싶다고. 그리고 애들도 보고 싶다고. 종대는 안심하듯 웃었지만 바로 입을 떼지는 못했다.


  “뭐야, 김종대. 벌써 지친 거야? 지칠 때까진 다가오겠다며.”


  경수는 말했다. 도르륵 굴러 종대를 향한 커다란 눈엔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거든! 어디서부터 말할지 생각하고 있었어.”


  종대 역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눈가에 주름이 지게 웃은 뒤 찬열과 백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마당과 테라스에 밭을 이뤘던 어느 날, 눈싸움을 하던 둘과, 그 사이에서 피어난 찬열의 마음. 그걸 홀로 안고 있어야 했던 찬열의 아픔, 하지만 이제는 오롯한 한 연인의 역사가 된 그 날의 이야기가 경수에게 전해졌다.










*










  눈이 내릴 만큼 제법 쌀쌀해진 날씨였다. 거실 보일러는 아직 켜기 시작하지 않았지만 저녁을 먹은 식구들은 늘처럼 한곳에 모여 있었다. 루한과 민석은 소파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찬열과 타오 그리고 종대는 티테이블에 빙 둘러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준면은 멀찍이 떨어져 부엌 홈바에서 글을 쓰고 있었고, 백현은 잔업으로, 이씽, 종인, 세훈은 동아리에 가서 아직 안 오고 있었다. 이씽이 평일 이른 아침부터 나가서 중요한 일인 것 같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한가 보다고 종대는 생각했다.

  간만에 촉이 온 건지 종대는 실수 한 번 없이 연속 콤보를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면이 꺼지더니 전화벨이 울리며 수신창이 떴다. 아, 왜, 지금! 종대는 앞에 앉은 찬열과 옆에 앉은 타오가 눈을 찡그릴 정도로 크게 소리치곤 전화를 받았다.


  -첫눈 온 기념으로 전화했더니, 게임하고 있었지.

  “오오- 어떻게 알았어요.”


  크리스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종대의 ‘네, 형!’ 한 마디에 상황 파악을 완료했다. 종대는 그것에 또 감동해서는 잘 풀리고 있던 게임에 미련을 버린 지 오래였다. 종대는 제 뒤에 있던 빈 소파에 올라가 통화를 했다. 입꼬리가 연신 귀에 걸려 있는 모습을 민석과 루한은 흐뭇한 듯 바라보았고, 찬열과 타오는 닭살 돋는다며 방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정작 종대 자신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전혀 돌보지 않고 통화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아 근데 쉬는 시간에 보니깐 경수한테 연락이 와 있는 거예요.”

  “뭐?”

  “진짜?”

  “경수?”


‘ 경수’라는 이름 하나에 찬열, 민석, 저 멀리의 준면까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 때 백현이 집에 돌아왔고 찬열은 아직 제한시간이 남은 게임을 내팽개치고 달려 나가 백현을 반겼다.


  “피곤하지! 수고했다.”

  “엉. 아오 야, 배고프다. 저 왔습니다.”

  “뭐야 밥도 안 먹고 한 거야? 변백현, 네가 아주 오늘 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싶어서 그랬구나.”


  찬열의 농담에 백현은 제 가방과 양복 마이를 받아든 찬열의 팔을 주먹으로 찌르듯이 쳤다. 찬열은 인상을 쓰며 아프다고 오버하면서도 입은 실실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백현을 부엌으로 데려가 짐은 의자에 내려놓고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근데 김종대는 뭐 하냐. 사람이 왔는데 인사도 제대로 안 해, 엉?”

  “쟤 지금 그 형님이랑 통화 중이야. 뭐 오늘 경수 만났다던데?”

  “어어?!”


  부엌 쪽을 향해 앉아 찬열을 보고 있던 백현이 의자 등받이를 잡으며 등을 휙 돌렸다. 백현이 집에 들어왔을 때도 핸드폰을 귀에서 잠시 떼고 ‘어 왔냐-’라며 성의 없이 인사했던 종대는 부엌의 찬열과 백현의 대화는 들리지도 않는 것인지 여전히 통화하기에 바빴다.


  -잘 했네. 잘 만났다, 그냥.

  “응. 근데 난 걔가……·, ‘종인이’ 얘기를 물어본 게 너무 신기해요. 일부러 말 안 했는데 왜 물어봤을까요?”


  종대는 거실에 함께 있는 식구들이 듣지 못하도록 종인의 이름을 작게 속삭였다.


  -그러게. 근데, 그 분이 그냥 처음에, 왜 널 만나자고 했을까?


  크리스가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 종대는 자신의 물음이 핀트가 엇나간 걸 알아채지 못하고 크리스가 물어본 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매일 듣는 라디오에 아는 사람이 나왔다. 그래서 연락을 했고 둘 다 시간이 맞아 밥이나 같이 먹기로 했다. 그 외의 이유가 또 있을까. 그렇다는 건 다른 의도를 갖고 자신을 만났다는 걸까. 그 다른 의도가 종인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던 걸까. 하기야 만나고 나서 경수가 종대에게 자발적으로 한 이야기는 ‘여전히 바쁘다’와 ‘잘 지내고 있다’라는 두 마디뿐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종대는 제가 크리스의 물음에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혀엉! 나보고 우리 식대로 생각하지 말자던 게 누군데! 와, 진짜 이렇게 낚을 거예요?”

  -아하하. 종대 진짜 진지하게 받아들였어. 진짜 웃겨. 아, 귀여워.

  “지금 귀엽다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아요. 아 진짜, 나 완전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딱히 애교를 부린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식구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징징거렸다고 할 수 있는데 식구들은 모두 모래를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종대가 마지막에 말꼬리를 살짝 늘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김종대 가라사대 지금 핸드폰 저 너머의 사람이 ‘귀엽다’라고 한 게 맞지? 같은 층을 쓰는 찬열과 백현은 종대가 통화하는 소리를 가끔 듣긴 했지만 그냥 즐겁게 통화를 하고 있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만 들려왔던 것이지 이렇게 내용 자체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타오, 루한, 민석, 준면도 마찬가지로 통화 내용을 들은 건 처음이었고, 다음부턴 종대가 크리스와 통화할 때 반드시 개방된 장소에서 하게 두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가능성도 생각해 봐. 내가 보기엔 그 분이 막 언짢게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은데. 그러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거 같고.


  크리스는 종대가 옛날처럼 두려워하고만 있을까봐 걱정되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말했다. 사실 종대가 경수와 종인에 대해 그렇게까지 어둡게 생각하고 있진 않아서 크리스가 옛날 생각까지 하며 걱정한 건 노파심이었지만. 그래도 크리스 덕에 종대는 좀 더 넓게 사고해 볼 수 있었고 그걸로 의의는 충분했다.

  어차피 침대에 들어가 메신저로 다시 할 거면서 이른 굿나잇 인사를 하고 둘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난 종대에겐 식구들의 질타가 날라들었다. 하지만 크리스 덕에 씩씩함과 용감함을 한가득 충전한 종대는 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러우면 같이 하면 되지 않겠냐며 더 짓궂게 반응할 뿐이었다. 갑자기 전화가 오는 바람에 크리스와의 통화를 식구들 앞에서 한 건 예기치 않게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는 것도 재밌어서 앞으로도 종종 해야 할 것 같았다.










-
140207

Posted by Neese
l



W.유쫑




30.1111 커플 대란





점심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오후, 모자를 푹 눌러쓴 찬열은 백현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 마트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니.”

“그래.”


낮잠을 자고 있던지라 백현은 찬열을 쳐다보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도 그걸 또 아무렇지 않게 단칼에 대답하는 찬열의 목소리에, 방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종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백현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세상에서 제일 빠른 리액션을 보여주는 찬열이어서, 만약 제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백현이 찬열을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누군가처럼, 둘 중 하나는 이곳을 떠났어야 했을까. 어쨌든 늘 티격태격하고 거친 말을 주고받기도 하는 게 울퉁불퉁하지만 그 모습이 순탄하게 반 년을 향해 가고 있는 둘이었고, 그들을 지켜보는 종대는 흐뭇하기만 할 뿐이었다.


찬열은 한 시간 쯤 후에 묵직한 마트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발목을 살짝 삐끗해 오늘 춤 연습을 쉬는 세훈과 잉여인 종대는 부엌으로 가는 찬열을 쪼르르 따라가 장바구니 안의 구매 내역을 확인했다. 종대와 세훈에겐 그냥 똑같은 밀가루로만 보이는 강력분과 박력분, 드라이이스트, 딱딱하고 커다란 초콜릿이 까만색과 하얀색 갈색의 종류별로, 그 밖에 불량 식품처럼 보이는 알록달록한 작은 사탕들. 간식거리를 기대하고 있던 둘은 당장 먹을 수 없는 것들뿐이라 실망하다가 마지막으로 막대 과자 두 통을 보고 환호를 질렀다.


“야야! 너네 그거 먹으면 안 된다.”


찬열은 환호를 뚫고 단호하게 과자 통을 빼앗았다. 이럴 거면 마트는 왜 갔대. 종대와 세훈은 찬열의 깊은 뜻도 모르고 잔뜩 실망했다. 이 전문가 냄새가 폴폴 나는 재료들로 뭘 하나 한 번 보자, 해서 둘은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뭐 만들려구?”

“빼빼로. 내일이 빼빼로 데이잖아. 변백 줘야지.”

“빼빼로를 만들어요? 그냥 사서 주면 되지.”


백현에게 주겠다는 말은 자체 필터링하고, 세훈은 분명히 그게 더 맛도 있고 값도 싸고 힘도 안 들었을 거라고 찬열의 사기를 꺾었다. 하지만 찬열은 아랑곳 않고 빼빼로 막대로 쓰일 그리시니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흔히 세훈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비글이라는 소리를 듣는 삼인방 중 한 명인 찬열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묵묵히 요리에 집중했다. 간혹 ‘아, 좀 더 넣었어야 되나.’, ‘그리고 다음엔?’ 등의 혼잣말을 하긴 했지만. 종대는 물론 다른 가족들도 거의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은 놀랍기만 했다.


“오- 오븐이 쓸 데가 있었구나. 난 저게 왜 있나 했네.”


찬열이 발효를 위해 오븐을 쓰는 것을 보고 종대가 말했다.


“예전엔 경수 형이 가끔 썼었어요. 뭐 그 때도 거의 안 쓰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세훈이 별 생각 없이 가볍게 한 대꾸였지만 종대는 가슴을 크게 쓸어내렸다. 종인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천 번 만 번 다행이었다.




저녁 준비를 위해 부엌을 쓰려고 기다리던 준면은 반죽이 오븐에 들어가자마자 찬열을 쫓아냈다. 찬열은 아직 발효시키는 중이라고 호소했지만 준면이 저녁밥을 기다리는 식구들을 등에 업고 있는지라 끝까지 반항하진 못했다. 게다가 김치찌개가 완성됐을 땐 1차발효도 끝난 참이라 바로 다음 과정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식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찬열아, 밥 안 먹어?”

“그래, 먹고 해라.”

“이거 먼저 해야 돼요.”


종대와 준면의 말에 찬열이 뚱하게 답했다. 실컷 낮잠을 자고 배를 채우러 내려온 백현은 식탁으로 가기 전, 홈바 구석에 홀로 초라하게 서 있는 찬열에게 다가왔다.


“뭐해.”


휴지를 시키느라 반죽에 덮어놨던 비닐을 걷는 찬열에게 백현이 말을 걸었다. 찬열은 동그래진 눈으로 백현을 봤다가 다시 반죽으로 눈을 돌렸다.


“빼빼로 만들려고.”

“빼빼로? 아…, 내일 11월 11일이구나. 뭘 만드냐. 그냥 사먹으면 되지.”

“너 줄려고 하지. 가서 밥이나 드세요, 변백현 씨.”


백현이 말을 걸었기 때문일까. 찬열은 금세 헤벌쭉해져 백현에게 웃으며 말했다. 반죽을 만지는 찬열의 옆얼굴을 줄곧 보고 있던 백현은 찬열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찬열이 3등분으로 나눈 반죽을 밀대로 미는 것까지 말없이 보고만 있다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맛있겠다. 그 말이 에너지원이 된 듯 찬열은 헤실헤실 웃으며 반죽을 밀었다.

뒤돌아서 식탁으로 오는 백현은 수줍어하던 낯빛을 금방 지우고 역시 베이킹은 타이밍이라며 허세 가득한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빠른 변화를 놓치지 않고 본 종대는 두 사람에게서 풋풋한 커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식구들 앞에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만 오히려 그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는 걸지도 몰랐다.








“와- 이게 다 뭐야? 네가 만들었어?”


데이트를 나갔다 온 민석이 식탁에 쌓여 있는 그리시니와 막대과자들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찬열을 도와주진 않고 옆에서 알짱거리기만 하던 백현은 그리시니만 찬열이 만들었다고 알려주곤 지금 빼빼로를 만들고 있는 거라고도 덧붙였다. 몰래 집어든 그리니시를 우물거리며 루한은 처음 보는 찬열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리고 민석에게도 먹어보라며 자기가 먹던 것을 먹여주다가 백현과 찬열에게 걸려 방으로 피신했다.

아아 뜨겁다! 찬열의 연이은 괴성과 함께 중탕되던 초콜릿이 마침내 다 녹았다. 둘은 다크, 밀크, 화이트 초콜릿을 각각 그릇에 덜고 초콜릿에 묻힐 토핑들을 쟁반에 넓게 펴고 의자에 앉았다. 과자에 붓으로 일일이 초콜릿을 바르는 게 답답해 백현이 그릇에 과자를 굴렸지만 그러면 원하지 않는 부분과 손에 까지 묻어 문제였다. 그러게 그냥 이걸로 하라니까. 답답해서 언제 하고 있냐. 또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거실 소파에 있던 종대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말았다.


“야 너네 뭐냐아!”


종대가 그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니 함께 있던 준면과 타오, 세훈도 휙 고개를 돌렸다. 찬열은 백현의 손목을 붙잡고 그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빨아 먹고 있었다.


“야야야야. 너네 작작해라?”

“헐. 대바기야. 더러어…….”

“어휴, 어디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어요.”


백현은 얼른 손을 뺐고 벌어진 찬열의 입에 대신 과자를 물려주었다.


“하하핫. 이런 손으로 빼빼로를 만들 순 없지. 손을 씻어야겠어, 손을.”


백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싱크대로 갔다. 그 때 민석과 루한이 커피를 마시려고 방에서 나왔다. 민석이 커피 만드는 걸 기다리던 루한은 자리에 돌아온 백현과 찬열이 고군분투를 하는 걸 보고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놨다.


“초콜릿을 비닐에 넣으면 안 돼?”

“오, 그럼 되겠다.”


민석은 루한의 손짓을 보지 않고 말만 듣고도 그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챘다. 하지만 루한이 계속 몸을 써가며 어떻게 하라고 설명해주는데도 그걸 못 알아들은 찬열과 백현은 왜 그래야 하냐고 되묻기만 했다. 할 수 없이 루한은 비닐을 가져와 초콜릿을 붓곤 그 안에 과자를 찍었다 빼는 것으로 몸소 시범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혁신과도 같은 아이디어에 찬열이 물개박수를 쳤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이후로 루한과 민석도 남은 자리에 앉아 빼빼로를 만들게 되었다. 아까 초콜릿 바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토핑 묻히는 것까지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던 찬열네와 다르게 새로운 조는 차분하게 빼빼로를 만들어갔다. 다 만들어져 있는 과자에 다 녹여져 있는 초콜릿만 묻히고 토핑을 붙이면 끝인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이런 건 처음인 6년 차 커플이라 처음 몇 번은 서로 만든 걸 보여주고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초콜릿보다 달달한 광경에 그 앞에 앉은 백현과 찬열만 곤혹이었다.


“어우. 저녁 먹은 게 체했나.”


백현이 얼굴을 한껏 구기며 빈정거려도 민석과 루한은 씨익 웃고 말 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한 게 남아 있었다. 말도 없이 열중해서 빼빼로를 만들기에 이제 애정행각도 끝났나 보다, 하고 백현과 찬열은 물론 거실의 식구들까지 내심 안심하고 있었지만, 민석이 심혈을 기울여 화이트 초콜릿과 밀크 초콜릿을 세로로 반반씩 묻힌 빼빼로를 보자 루한이 아아, 하고 입을 벌렸고 민석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장단에 맞춰 빼빼로를 먹여준 것이었다. 백현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뉘이며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고 종대는 저 멀리서 다시 한 번 괴성을 지르며 닭살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그럼 이렇게 해요. 빼빼로 데이 기념 커플대전. 더 맛있게 만드는 쪽을 우리 집 공식 커플로 하고 깨를 볶든 콩을 볶은 암말도 안 할 테니까.”

“야야야, 그러면 나랑 찬열인 그냥 할 필요가 없지. 우리가 무슨 닭살을 떨었다고.”


종대의 의견에 백현은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금방 몸을 앞으로 말아 집중해서 빼빼로를 만드는 게 그 대결을 내심 신경 쓰는 듯했다. 그리고 포상이 무엇이든 대전이라는 말에 이미 루한은 승부욕에 불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민석은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일단 루한이 열심히 하기에 따라서 손을 움직였고, 단순히 백현에게 빼빼로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일을 벌인 장본인인 찬열은 그 초심을 잃지 않고 만들 뿐이었다.


“그럼 일드은 누가 결쩌해?”


거실에선 누가 심사를 볼 건지를 놓고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찬열이 백현 혼자선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재료를 많이 사와서, 워낙 방대한 양이니 가족들이 하나씩 집어먹어도 서로의 연인에겐 배불리 먹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의 아량을 베풀어줄지도 모르겠고 또 여러 개를 먹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었다. 준면은 집주인이니까, 세훈은 솔로를 대표하는 피해자로, 타오는 그냥, 종대는 자기 아이디어니 자기여야 한다는 각각의 이유를 내세웠다.


“그래도 형은 안 돼요. 형도 커플이잖아요.”


그냥이라는 타오의 근거 없는 근거에도 아무 말 없던 세훈은 종대에게만 따지고 들었다. 그러면 종대는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반박했다.


“싫어,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염장 못 지르는데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 심사 위원은 제일 공평한 방법인 가위바위보로 선정되었는데, 우습게도 제일 합당하지 않은 이유를 댄 타오였다. 타오는 만세를 외치며 좋아했지만 정작 어느 쪽이 더 맛있다고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계속 먹기만 했다. 사실 같은 재료를 썼으니 맛이 다르면 더 이상했겠지만. 결국 중요한 건 얼마만큼 더 맛있어 보이고 예뻐 보이는지에 대한 외관의 문제였다. 백현은 계속 먹기만 하는 타오에게 구박을 시작했다.


“야 타오, 너 어째 계속 먹는다?”

“큰데 내가 먹지 아느면 알 수가 업자나.”

“여태 먹었는데 알 수가 업자나. 그럼 늬 혀가 이상한 커야.”


백현이 타오의 말투를 따라하며 놀리니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부엌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결국 심사위원이고 뭐고 다 같이 빼빼로를 먹으며 떠들고 있는데, 연습을 마친 종인과 이씽이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종인의 손엔 빼빼로를 비롯한 과자와 초콜릿 등의 간식거리들이 잔뜩 들어 있고 예쁘게 꾸며져 있기까지 한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뭐냐, 누구한테 받은 거냐, 묻는 식구들에게 종인은 자기 것이 아니라며 종대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부드러운 갈색 계열로 다시 염색을 한 종인에게선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뭐야? 왜 이걸 나한테 줘?”

“형 꺼니까 형한테 주죠.”

“내꺼라고?”


종대는 멍해져서 천천히 바구니를 받아들었고 손잡이 부분에 매달려 있는 두꺼운 종이에서 JD라는 이니셜을 발견했다. 그 다음엔 빠르고 거침없이 포장을 풀러나갔다. 과자상자를 하나씩 꺼내도 종대가 찾는 크리스의 흔적은 보이지 않자 마침내는 바구니를 거꾸로 들어 남은 과자들은 바닥에 모두 쏟아냈다. 중력을 거부하지 못하는 바구니에선 작은 카드도 톡 떨어지며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 씨냐?”


준면이 물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카드엔 크리스의 동물 캐릭터 중 하나인 돌고래가 그려져 있었다.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JD의 글씨체부터 당연한 결과긴 했지만 종대는 그 그림만 보고도 이 카드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알았고 벅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 형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염장 못 지른다는 말에 종대에게 조금의 동정을 느꼈던 세훈이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종대가 카드를 보고 감동하고 있는 틈에, 바닥에 떨어진 과자와 초콜릿을 품에 몰래 쓸어 담고 있는 종인을 보고선 장난기가 돌아 음흉한 미소로 따라 줍기 시작했다. 못생긴 글씨가 괴발개발 쓰여 있는 카드를 소리 내어 읽는 종대는 제 아래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Dear 종대. 빼빼로day 선물 잘받았어. 식구들이랑 같이 맛이게 먹어^^ 종대 혼자 다먹어도되고!^^ I love U.”


영어가 섞여 있고 맞춤법도 조금 틀리고, 그림이나 편지 끝에 거의 빠지지 않는 웃는 표정의 이모티콘이 종대는 정말 크리스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크리스스러움은 종대 뒤와 옆에서 작은 카드 안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는 준면, 타오, 이씽이나, 종대의 목소리를 통해 카드 내용을 듣고 있는 백현, 민석, 찬열, 루한이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과자 줍는 것에 열중하고 있는 세훈, 종인이나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다들 닭살 돋고 느끼하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야유를 하기엔 일렀다. 가장 강한 마지막 한 방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p.s.생일 밤엔 정말 좋았어^^”


종대가 이모티콘의 ‘웃음웃음’을 읽기도 전에 백현이 펄쩍 뛰며 외쳤다.


“왜왜왜. 야, 너 뭐 했냐. 엉?”

“왜, 내가 뭐 했을 것 같은데?”

“어우- 이 응큼한 김종대!”


백현은 혼자 지레짐작하며 몸서리를 쳤다. 종대는 뭔지 일단 말해보라고만 할 뿐 끝까지 답을 내놓진 않았다. 그럼에도 식구들은 이 어수선하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고 백현을 따라 종대를 놀려댔다. 크리스의 생일선물 건으로 종대를 상담해주었던 루한과 민석은 종대의 선물이 정말 식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맞을까, 맞다면 ‘그것’뿐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우리 이런 일, 언제 한 번 있지 않았어?”


민석이 뭔가가 생각나 말하자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었다. 식구들은 언젠가, 종대가 크리스에게서 온 편지나 글 따위를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자랑스럽게 읽었던 적이 있던 것 같아 정말이라고 입을 모았다. 식구들이 데자뷰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종대는 크리스가 보낸 카드를 한 번 더 읽으며, 자신의 첫 번째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우표 없는 그의 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유 스킨십 배 커플 대결은 커플들에게 있어선 안타깝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오븐까지 쓰던 찬열의 수고를 생각하면 찬열네가 이겨야 마땅했지만, 라떼아트도 할 줄 아는 민석의 섬세함을 기술적으로 따라잡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정보다도 심사 위원에게 더 큰 영향을 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준면의 입김이었다. 승자를 예상하고 있던 준면은 이대로 가면 셰어하우스가 꿀에 절여질 거라는 판단 하에 미리 타오에게 빼빼로를 맘껏 먹어도 좋으니 무승부를 내라고 귀띔해놨던 것이다. 사실 진다고 해도 굴하지 않고 애정행각을 할 루한이라는 건 식구들 모두 암암리에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사실 종대는 주말이 되기 전에 크리스의 사무실 직원에게 여러 간식거리와 편지가 들어 있는 상자를 미리 맡기고 왔었다. 식구들이 데자뷰라고 느끼던 그 우표 없는 편지에 늦게나마 보답을 하려고 준비한 이벤트여서 크리스에게 다시 선물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 때와 같은 수법으로 말이다. 가족들에게 과자나 초콜릿을 한 상자씩 주고도 남은 간식들은 바구니에 담긴 채 종대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종대는 그 중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초콜릿을 하나 까서 입안에 넣곤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눌렀다. 달콤한 것이 입안에서 굴러가고 있는 초콜릿인지 자신의 기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응, 종대.

“응, 종대, 응, 종대래! 이렇게 시치미 뗄 거예요?”

-으음? 뭐가? 난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웃음을 참으며 모르는 척하는 크리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다 티가 났다.


“선물 잘 받았구요. 카드도 잘 받았어요. 근데 자기 캐릭터 있는 카드를 보내는 건 또 뭐예요. 진짜 웃긴 형이라니까.”

-일종의 홍보지. 우리 노래 잘 하는 애인 대변인. 아, 동물이니까 대변동물인가?


돌고래 캐릭터는 노래할 때 고음이 시원하고 깔끔하게 잘 뽑히는 종대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종대는 노래 칭찬을 들을 때면 늘 그렇듯 수줍게 웃었지만 하지 말라는 말은 않았다.

크리스의 선물을 식구들에게도 잘 나눠줬고, 식구들이 잘 먹겠다고 전해달라고도 했고, 또 오늘은 찬열이 수준급의 솜씨로 빼빼로를 만들었고, 그것 때문에 백현과 찬열 대 루한과 민석으로 어느 쪽이 더 닭살스러운지 커플 대결도 열렸고, 크리스의 카드 마지막 말에 식구들이 다시 한 번 쓰러졌다는 것까지 종대는 하루 일과를 쭈욱 전했다. 특히 커플들의 애정행각을 고발할 땐 헛구역질 소리까지 내가며 말했지만 크리스의 반응은 오히려 덤덤했다. 그 이유는,


-근데 내가 보기엔 우리가 제일 짱인 거 같은데?


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 때문. 종대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응. 내가 진짜 장담한다. 떨어져 있는데도 이렇게 로맨틱한데 실제로 봤으면 어땠겠어. 완전 게임 오버지.

“아하하하! 아 진짜 미치겠다, 우리 형. 근데 뭐,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종대는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말했지만 어쨌든 크리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했다. 바깥에선 설거지를 마치고 올라온 듯한 백현과 찬열이 김종대 웃는 거 진짜 시끄럽다고 구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대는 크리스와 함께 진정한 승자는 우리라며 즐겁게 떠들기 바빴다. 초콜릿은 입안에서 다 녹은 지 오래였지만 종대의 기분은 아직도 달콤하기만 했다.










-

140202

Posted by Neese
l



W.유쫑




29.일일야화(一日夜話)





“아아- 왜 벌써 11월이냐구우우.”


당장 다음 주가 크리스 생일인데 준비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며 종대가 징징거렸다. 준비해야지, 준비해야지, 몇 번이나 되뇌었던 생각은 머릿속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10월이 11월이 되는 숫자의 변화 앞에서야 퍼뜩 튀어나왔다.

민석이야 야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처음 듣는 소리라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같이 있던 준면은 이제 귓구멍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 뜨고 감을 때까지 징징거리는 것도 능력이라고, 깊은 한숨과 함께 비꼬기도 했다.


“안 돼에- 아 진짜, 날이 언제 이렇게 빨리 왔지? 미치겠다아……. 민석이 형, 뭐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요? 아 제바아알. 루한이 형한테 선물 많이 줘 봤을 거 아니에요.”

“내가? 무슨! 아니야.”

“아 빠오즈! 왜 또 부끄러워하고 그래!”


민석이 고개를 힘차게 저어 오히려 긍정을 뜻하는 지나친 부정을 하니 종대 옆에 앉아 나름대로 상담을 해주고 있던 루한이 씻으러 들어가는 민석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민석의 뒤를 총총 따라갔는데 준면이 티셔츠 뒷목 부분을 잡아 주욱 늘려 말리는 바람에 욕실까지 따라 들어갈 순 없었다. 부부 사이인 걸 밝히고 나더니 집안 곳곳에서 대놓고 바퀴벌레 티를 내는 둘, 아니 루한이 99% 애정 표현을 하고 민석은 전처럼 튕기지 않고 받아주기만 할 뿐이었으니, 대놓고 바퀴벌레 티를 내는 루한이었다.


“아! 루한이 형, 옛날에 민석이 형 수건만 걸친 거 보고 코피 흘린 적도 있잖아요. 역시, 내가 그 때 냄새를 딱 맡았다니까.”

“야야야! 종대 너 조용히 안 해?”


준면에게 잡혀 버둥거리던 루한이 순식간에 준면의 손을 뿌리치고 종대에게 달려왔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종대 앞쪽에 앉아 있던 백현과 찬열은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의 눈빛으로 루한을 보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이 형이 아주 음란마귀가 제대로 꼈구만?”

“수건을 어디 걸쳤는데? 어? 형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당연히 거기에 걸쳤……. 엉두도 아 대어다?”


찬열의 질문에 종대가 까불까불 모든 걸 털어놓으려고 했고 루한은 이번엔 놓치지 않고 제대로 그 입을 막았다. 종대는 입이 막힌 것에 아랑곳 않고 ‘원두도 다 태웠다?’라고 말했지만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음이 뭉개지는 게 답답해 찬열은 종대에게 루한이 손을 떼도록 침을 발라버리라고 시켰다. 종대는 그것까지는 꺼려졌고 대신 루한의 손을 잡아당겨 이로 깨물었다. 그리고 루한이 아파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 담엔 바로 들어가서 방문 잠그던데?”








동생들에게 한껏 물어뜯긴 루한은 방에 들어와서도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핸드폰 게임만 해댔다. 종대는 크리스의 생일 선물에 관해 도움을 받고 싶어 다 씻고 나온 민석을 따라 들어왔지만 도움을 받으려면 루한의 기분을 먼저 풀어줘야 할 것 같아서 갖은 애교를 부렸다. 루한이 형, 루한이 혀엉- 하는 소리에 결국엔 민석이 발끈했다.


“그런 건 크리스 씨한테 가서 하면 안 돼?”


수분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어서 민석의 볼은 보이지 않았지만 종대는 그 볼이 분홍빛이 되었을 것 같았다. 하여튼 안 밝힌다 해놓고 코피 흘렸던 루한이나 내숭 떨면서 할 건 다 하는 민석이나, 참 천생연분인 커플이다. 종대는 그런 형들이 귀여워 웃어버렸다. 어쨌든 다행히, 민석의 질투 덕에 루한도 한순간에 기분이 풀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상담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는 생일 선물로 뭐 받았는데?”


다른 사람이 올라오면 주인이 발로 차 쫓아낸다는 루한의 침대에 민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앉았다. 안타깝게도 종대 역시 특권이 없는 그 ‘다른 사람’ 중 하나였기에 루한의 의자에 등받이를 껴안은 채 거꾸로 앉아 있었다.


“저는 옷 받았어요. 티. 밥도 먹고.”

“티? 무난하네.”


민석의 대꾸에 종대는 잔뜩 흥분해서 손사래까지 쳐가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게 어떤 티인데요. 한정판이에요, 한정판.”


종대는 이건 봐야 한다며 귀찮음을 무릅쓰고 크리스에게 받은 셔츠를 가지러 갔다. 민석이 루한에게 티도 한정판이 있냐고 묻자 패션 쪽에선 전문가인 루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과연 어느 브랜드 것일까, 조금의 기대를 갖고 기다렸다.


“어! 나 이거 알아. 소식 들었어.”

“나도 이 캐릭터는 본 적 있다. 근데 무슨 소식?”


종대가 갖고 온 티셔츠는 까만색과 하얀색 한 장씩으로, 집 회사만 오가는 민석도 알 만한 유명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캐릭터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모두 동물이고, 각 동물의 특징만 살려져 있는 게 포인트였는데, 그 심플함과 귀여움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얀색 티는 가슴 부분에 여러 동물 캐릭터들이 손을 잡고 서 있었고 뒤엔 동물을 사랑하자는 내용의 글씨가 영어로 쓰여 있었다. 캐릭터 디자이너가 동물 보호 단체와 손을 잡고 홍보용으로 만들어서 이슈가 됐었다고 루한은 민석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까만색 티에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의 웃는 얼굴이 하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동물 캐릭터만 그리기로 워낙 유명한 작가여서 다른 상표인가 하고 봤지만 그림 아래엔 하얀색 티셔츠에 있던 것과 같은 싸인이 찍혀 있었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데?”


루한이 까만색 티셔츠를 종대를 향해 펼쳐 보였다.


“네. 그건 우리 형이 나 주려고 특별 제작한 거니까요. 저랑 닮았죠!”


종대가 티셔츠를 뺏어 자기 얼굴 옆에 놓고 활짝 웃었다. 루한과 민석은 티셔츠의 그림과 종대를 번갈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나마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닮아서 간신히 수긍했다. 그러면 또 종대는 우리 형이 그린 건데 왜 이런 반응이냐며 찡찡거렸다.


“너네 형이 그리셨다고? 그냥 하나 사주지, 그림 되게 못……. 잠깐……. 그럼 이것도 너네 형이 그린 거야?!”


입을 비틀고 비웃던 민석이 하얀색 티셔츠를 집어 들며 물었다. 민석의 질문에 루한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대를 바라보면 종대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민석과 루한은 왠지 끙끙 앓던 수수께끼의 답이 너무 쉬운 걸로 밝혀진 것처럼 맥이 탁 풀렸다. 하긴 종대가 이렇게 쉽게 말하는 걸 보니 진즉에 너희 형 뭐하시는 분이냐고 한 번만 물어봤으면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놀라운 건 놀라운 것. 얼떨떨하던 둘은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극히 조용히 밝혀진 지극히 평범하지 않은 사실은, 자기는 생일 선물을 뭐 해주냐는 종대의 집요한 질문으로 금방 화제에서 묻혔다. 루한은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뗐다.


“첫 선물은…….”




첫 선물은 중국어 단어장이었다.

한국어 공부를 하러 유학을 온 루한은 축구 동아리에서 민석을 만났다. 당시 3학년이던 민석은 동아리 활동은 잘 하지 않았지만 루한과는 동아리실에서 이야길 나누며 친해졌다. 그리고 민석의 아이디어로 루한은 민석의 여동생에게 중국어 과외를 하게 되었다. 같이 밥을 먹거나, 과외가 있는 날엔 민석의 집에 함께 가거나 했고,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민석은 취업준비를 루한은 한국어 공부를 하며 모르는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성격이 워낙 잘 맞아 민석은 루한과 이야길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을 느꼈고, 타국에서 의지할 곳 없는 루한도 민석을 만나 잘 됐다고 생각했다.

과외 마지막 날, 루한은 민석의 집 현관에서 민석의 여동생과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민석에게 중국어 단어장 한 권을 내밀었다. 여동생은 동그란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고, 루한의 눈짓에 첫 페이지를 편 민석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계속 연락해야 돼


맞춤법은 다 맞았지만 유치원생처럼 삐뚤빼뚤한 글씨가 그렇게 쓰여 있었다. 둘이 따로 만났을 때 줬어도 됐을 텐데 루한은 왠지 모르게 그 날, 그 장소에서, 건축 전공인 민석에겐 필요 없을지도 모를 그 단어장을 주고만 싶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건 아마 민석과 자신이 그냥 친구가 아니라 좀 더 특별한 사이인 걸 비밀스럽게 뽐내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루한이 형은 그 때부터 민석이 형을 좋아했어요?”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나자 마치 자신이 겪은 일처럼 형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던 종대가 물었다.


“아니. 그 땐 아니었어. 그냥, 마음도 잘 맞고, 중국 가서도 계속 친구 하고 싶은 친구라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은 누구랑 결혼해서 중국도 못 가고 있고.”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지.”


그 ‘누구’인 민석이 말하자 루한은 웃으며 말을 정정해주었다. 종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편인 만큼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큼큼 헛기침을 하고 다른 선물은 또 뭐가 있었냐고 물었다.


“두 번째는…….”




두 번째 선물은 넥타이였다. 그리고 이번 선물도 루한으로부터 민석에게.

휴학계를 내고 인턴 준비를 하던 민석이 여러 곳에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어서 루한은 힘내라는 뜻으로 넥타이를 선물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면접 때 민석은 루한이 준 넥타이를 하고 나타났다.


“어때? 잘 어울려? 괜찮아?”


짧은 앞머리를 오른쪽으로 단정하게 넘긴 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루한은 엉성한 넥타이를 고쳐 매주고 엉덩이를 떠밀며 민석을 회사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뒤도 한 번 안 돌아보네. 루한은 긴장한 게 여실히 드러나는 민석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히 웃었지만 그렇다고 지켜보는 걸 그만두진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민석은 건물 입구 앞에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꽤 먼 거리였지만, 가만히 멈춰 있다가 활짝 웃으면서 팔을 높이 들어 손을 휘젓는 민석의 모습을 루한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그가 기대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민석에게 함께 손을 흔들어주는 자신의 마음도.

그 해 이른 겨울, 추위를 많이 타는 민석에게 루한은 장갑과 함께 꽃다발을 바쳤다.


줄 게 있다고 해서 잠깐 집에서 나온 거라 민석은 반팔 차림이었다. 하지만 집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릴까 루한을 끌고 아파트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 루한에게 받은 꽃다발과 장갑 상자를 꼬옥 쥐고 바들바들 떠는 민석처럼 루한의 마음도 터질 듯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안함보다 지금 당장 민석이 너무 추워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려, 민석이 자기를 불편해하든 말든 겉옷을 벗어 주었다. 민석이 괜찮다며 한사코 말렸지만 루한은 묵묵하고 고집스러웠다. 둘은 단지 안의 공원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으며 바닥엔 낙엽들이 뒹굴거렸다. 민석이 걸어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정리했던 말들은 막상 꺼내려고 하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민석은 걸으면서 아무런 생각도 못했을지 모른다.


“……난 너 같은 용기가 없어……. 당장 취업도 해야 하고…, 너처럼 고백할 용기도 없어.”

“……괜찮아.”


바닥을 보며 이야기하던 민석이 루한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그 다정한 눈은 오늘도 변함없이 같았다. 민석의 말에 실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변함없이 따스히. 자신을 담는 루한의 눈은 항상 그러했다. 그가 언제부터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눈이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민석에겐 중요했다.


“사귄다 해도 주변에 말할 용기도 없어. 숨기 바쁠 걸?”

“괜찮아.”

“…….”


민석은 말문이 막혔다. 루한이 갖고 있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게 분명했다. 민석은 그 마음을 자신이 오롯이 받아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리고……, 그리고, 난 너만큼 널 좋아하는 게…….”


어려워.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너를 좋아해줄 수가 없어. 민석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민석.”


한국에 온 지 2년 차였던 당시의 루한은 지금처럼 발음이 좋지 못했다. 민석, 이라는 두 글자는 어눌한 소리로 흘러나와 민석의 귓가를 감쌌다. 민석이 대답만 하고 자신을 보지 않자 루한은 꽃다발을 슬며시 빼앗았다.


“네가 한 말, 너도 날 좋아하긴 한다는 거지.”


루한이 눈을 내리깐 채 꽃을 보며 말하면 민석은 그 제야 다시 루한을 보았다. 그거면 됐어. 루한은 꽃다발을 민석에게 한 번 더 내밀었다. 이거 안 받으면 나도 그만 할게, 라는 말에 민석은 꽃다발이 아니라 루한을 안아버렸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공원 바깥쪽으로 지나다녔지만 둘은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




다음 해 루한은 유학 기간이 끝났고 인턴십을 마친 민석은 복학을 했다. 루한은 새로운 비자를 발급받아 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했고, 4학년이 된 민석은 공부와 취업준비로 지옥문이 열린 참이었다. 둘은 서로 만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웃고 하는 게 휴식이었다. 만나서 하는 일중에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복학 전부터 바빴던 민석이라 하루는 데이트를 하다가 코피를 쏟았는데 그래서 그 해의 생일 선물은 한약이 되었다. 민석 역시 루한에게 줄 선물을 신경 쓰고 있었기에 인턴십에서 받은 돈을 거의 다 투자해 미리 시계를 사둔 참이었다. 하지만 정작 루한의 생일 당일엔 수업의 조 모임이 있어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모임이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 전철을 타고 또 미친 듯이 달려 루한의 집으로 가니 다행히 12시가 지나기 전이었다. 루한은 생일 축하한다는 말소리보다 헥헥거리는 숨소리가 더 많이 나는 민석을 보고서는 현관문도 닫지 않은 채 민석을 안아 버렸다. 땀이 많은 민석이 난감해하며 밀어내도 루한은 껌딱지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대박이었어.”


루한이 양손의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종대가 뭔데요뭔데요 하고 물으면 루한은 종대가 아닌 민석을 보며,


“말해도 돼?”


라고 물었다. 민석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면서도 말해 보라며 부추겼다. 하지만 루한은 입꼬리를 내리며 웃음만 터뜨릴 뿐 선뜻 말하지 못했다. 종대는 그 부끄러운 망설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했다.


“아- 뭔지 알겠다. 나 읽었어.”


민석과 루한은 차례로 정말이냐고 물었고 종대는 그렇다며 어서 다음 이야기나 해달라고 졸랐다. 크리스마스에, 대박인 선물인데, 그 선물이 얼굴 붉히며 쉽게 말 못할 거라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루한은 침대에서 일어나 종대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뒷걸음질 쳐 풀썩 앉으려다가 2층 침대의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다. 루한이 정신을 못 차리며 뒤통수를 잡고 구르는 바람에 이번 이야기는 민석이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 사귄 지 연수로만 2년 째였을 거야…….”




민석은 인턴십을 했던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루한은 민석이 입고 출근할 양복을 생일선물로 준비했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가 스테이크를 사 먹였다. 민석은 처음엔 신이 나고 행복하기만 했지만 밥도 잘 못 먹고 자기만 보고 있는 루한 때문에 안 좋은 예감을 받았다.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루한은 웃으며 다 먹으면 말해주겠다고 할 뿐이었다. 하지만 불편한 공기에서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민석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냥 말하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중국, 갔다 와야 해.”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신 할아버지께서 가족들과 여행을 갔으면 하신댔다. 안 좋은 예감엔 이별이라는 최악의 경우까지 포함됐던 터라 민석은 한시름 덜었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불안한 마음은 루한의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도 민석 네 얘기 할 거야.”


출국 전 날, 민석의 자취방에서-민석은 루한과의 교제에 부모님에게 자격지심을 느꼈고 대학 때도 안 했던 자취를 하고 있었다- 루한은 자랑하듯이 말했지만 민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 ‘응? 민석 듣고 있어? 나 말할 거라니까.’라고 보챘다. 팔베개를 해주고 있어 차마 몸을 완전히 들진 못하고 배에 힘들 주어 상체만 살짝 들어 올린 채로. 그러면 민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침대 밑을 뒤지기 시작했다. 민석이 침대에 올려놓은 건 에메랄드색의 선물상자였다. 루한이 상자를 여니 안에는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어? 근데 신발 선물은 뜻이 안 좋지 않아요?”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종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연인에게 신발 선물을 하면 그 신발을 신고 멀리 도망가서 금방 헤어진다는 말이 있으니까 말이다. 민석은 종대의 말에 빙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한 짝만 줬지.”




이게 뭐냐는 루한의 질문에 민석은 미리 생일 선물이라고 답하곤 한 짝을 빼 들었다.


“이거 신고 나 떠나지 말라는 뜻이야. 그니까 이건 돌아오면 줄게.”


신발을 꼭 쥐고 말하는 민석의 표정이 짐짓 진지해서 루한은 민석이 불안해했음을 그 제야 알았다.


“민석 바보야? 내가 널 왜 떠나.”


루한은 그리 말하며 선물 상자를 옆으로 치우고 침대에 걸터앉았고, 바닥에 앉아 있던 민석의 머리통을 안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부모님께 말씀드릴 거라고 하자, 방금 전에는 딴 생각으로 전혀 듣지 못했던 민석이 깜짝 놀라 정말 괜찮겠냐고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루한의 가족 여행은 생각보다 꽤 길어졌다. 근 두 달 간 민석은 루한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이 생각보다 루한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족 여행을 그렇게 오래 다니는 걸 보면, 비싼 선물을 잘도 해주던 루한은 보통 부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회사 일에 치이고 연인마저 곁에 없는 와중에 민석이 그래도 지치지 않을 수 있던 건 루한에게서 오는 엽서 때문이었다.




재회는 다 져 버린 벚꽃나무 아래에서였다. 둘 다 성격상 멜로 영화를 즐겨보진 않지만 그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처럼 멀리서부터 서로를 향해 뛰어가 와락 안겼다. 입을 맞추고픈 욕심은 밖인 관계로 잠시 버리고 루한은 민석에게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근처에 있던 벤치에 앉아 쇼핑백과 그 안의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엔 민석이 루한에게 반만 준 신발과 색만 다른 신발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이거 신고 도망 와라, 나한테. 민석은 루한의 재치 있는 말에 웃으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그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건 다음 말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좋아할 수 있게 해줘서 난 그게 고마워.”


민석을 보는 루한의 눈빛은 여전히 따스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민석은 결국 바닥에 떨어진 벚꽃과도 같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는 둘에게 최고의 위기였다. 민석은 작년보단 덜 바빴지만 이젠 루한이 정신없을 정도로 바빴다. 인터넷 쇼핑몰을 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민석은 루한이 외국인이라 사기는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바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타이르면서도 예전처럼 연락을 자주 하지도 않고 연락이 먼저 오지도 않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싸움이 잦아졌고 한 번은 정말 크게 싸워 2주나 연락을 하지 않기도 했다. 하필이면 민석의 생일이 끼어 있던 때였다. 루한에게선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가 왔지만 민석은 문자가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져 답장하지 않았고 그걸로 땡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석은 문득 깨달았다. 여태까지 더 바쁜 쪽은 항상 자신이었고, 그래서 기다리고 맞춰준 쪽은 루한이었다는 걸.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사과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늘 먼저 다가와준 루한이었기에 민석은 용기를 냈다. 퇴근 후 무작정 루한의 집에 찾아갔지만 집은 비어 있었고 전화도 먹통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한 번 더 마음을 굳힌 민석은 싸우기 전에 한 번 놀러 가보았던 루한의 작은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루한은 그곳에 있었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눈은 퀭했고 수염도 듬성듬성 나 있었다. 처음 보는 루한의 모습에 민석은 조금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차분히 말하는 민석을 보던 루한의 퀭한 눈이 금방 촉촉해졌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루한은 아무런 말도 없다가, 휑하고 깜깜한 사무실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민석을 향해 팔을 벌렸다. 민석은 망설임 없이 루한에게 걸어갔고 그를 있는 힘껏 안아주었다.


“커플링은 좀 그렇구, 커플 팔찌.”


화해하고 나서 찾아온 루한의 생일에 민석은 루한 몫의 팔찌를 내밀며 제 손목에 차여 있는 같은 디자인의 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루한 몰래 맞추느라 진땀을 뺐고 선물 주는 게 처음도 아닌데 건네주는 일 하나가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몰랐다. 빨개진 민석의 귀를 보고 장난기가 오른 루한은 직접 채워달라고 해서 민석이 부끄러워 아예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잘 듣고 있던 종대는 너무 듣고 있기만 했던 건지 눈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졌고 고개를 점점 숙이더니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던 팔에 아예 묻어버렸다. 어느 새 종대의 고민 상담이 아니라 추억팔이로 변질된 이야기보따리를 접고 민석은 종대를 깨웠다.


“대박. 나 잤어요?”


민석의 손이 닿자 홱 고개를 젖힌 종대는 자기가 잠들었던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 야, 미안하다. 너 상담하러 왔는데 우리 얘기만 해서.”


민석은 자기가 자서 더 미안하다며 그냥 나가려는 종대에게 티셔츠 두 장을 챙겨주었다. 티셔츠를 보니 다시금 떠오르는 크리스의 실체에 루한과 민석은 다시 한 번 믿기 힘들다는 듯 피식 웃었다. 종대는 티셔츠를 받아들고 두 사람의 방을 나서다가 걸음을 물러 거의 닫혔던 방문을 다시 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정작 크리스의 생일선물에 대해선 같이 고민도 못 해줬는데 뭐가 고맙다는 건지. 쟤도 참 특이해. 민석은 불을 끄고 침대 2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그런데 루한이 사다리를 밟는 민석의 발목을 턱 잡았다.


“굿나잇 키스 안 했어.”


사다리를 한 칸 올라갔던 민석은 씩 웃곤 내려와서 루한의 입술에 뽀뽀를 해주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두 번, 세 번. 몇 번이나 뽀뽀를 하다가 서로의 입술을 살짝 빨아들이며 굿나잇 키스는 끝이 났다.


민석, 기억나? 그 다음에 내가 프로포즈 했잖아.
당연히 기억나지. 종이학 천 마리 속에 숨어 있던 반지.
남들 다 하는 케이크 속 같은 건 재미없잖아.
넌 결혼을 재미로 했냐.
너랑 있으면 재밌는데 어떡해.
나도 그래.


어둠 속에서도 대화는 계속 되었다. 둘만의 결혼식과 2년 전 이 집에 들어온 것, 그리고 혼인 신고. 옛날 생각에 두 사람의 입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루한의 말에 응, 응, 대답을 하며 그 때 그 때를 떠올리던 민석은 야근의 여파로 서서히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민석아 자? 루한의 웃음 섞인 물음이 희미하게 들려와 민석은 앓는 것처럼 으응 소리를 냈다. 잘 자, 하는 달콤한 목소리 뒤로 포근한 어둠이 민석을 덮었다. 응, 너두.










-
140130
Posted by Neese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