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 혁명
of the β, by the β, for the β
3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던 승우는 교정에서 앞서 걷고 있는 한 커플을 보게 되었다. 둘이 어찌나 다정한지 팔짱을 낀 뒷모습에서도 하트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질투심이 든 승우는 조그맣게 주문을 외우며 손가락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런데 의도와 다르게, 바람은 여학생이 치마 밑이 아닌 저 위쪽을 향해 불었다. 그에 교실 창가에 있던 화분이 쓰러지며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안 돼!!!!!!!!”
승우는 그 화분을 제가 막겠다고 여학생을 향해 달렸다. 여학생을 밀친 승우의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지려는 찰나,
“......엥?”
꼭 감았던 눈을 떠보니 화분은 승우의 뒤쪽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 여학생과 같이 걷던 남학생이 주문을 외워 막은 것이었다. 남학생은 넘어진 여자 친구를 향해 달려갔다.
“예슬아, 괜찮아?”
“응. 윤재, 고마워.”
“괜찮긴, 여기 까졌네.......”
예슬은 알파고 윤재는 오메가다. 그러나 둘은 정략결혼이 약속된 사이가 아니라, 서로가 좋아 교제를 하는 중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도 저렇게 사랑을 하는데 왜 자신은 베타인데도 알파인 정환과 이어지지가 않는 것인가. 예슬과는 친구 사이였지만, 승우는 예슬 커플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부러움과 시샘을 느껴버렸다.
“승우야, 넌 괜찮아?”
“그러게.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윤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예슬이 승우에게 물었다.
“아.... 난 뭐.......”
승우는 친절한 한 쌍에 멋쩍어져서 뒷머리만 긁적였다.
정환은 군대 간부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니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와 있었다.
“웬일이야? 문은 어떻게 열었고.”
“문은 아까 현우가 있었고.... 넌 모임 자리에서 통 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 현우는 잘난 피아노 실력으로 알파들의 사교 모임에 출석하고 있으니 준영과 아는 사이일 만도 했다. 현우를 마크하는 정환은 그것도 본부에서의 지령 같다고 생각했지만 제 짐작일 뿐이라 반드시 그럴 거라 믿고 있진 않았다.
“그런 데 안 나가는 거 알잖아.”
“하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이 형이.......”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던 정환이 여전히 거실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는 준영을 돌아보았다. 준영은 위스키 잔을 흔들어 탈그락탈그락 얼음 소리를 냈다. 구제불능인 준영의 모습에 정환은 피식 웃으며 백기를 든다.
정환이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는 건 사실 안 하는 것보다도 못 한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정환의 집안도 20년쯤 전까지만 해도 내로라하는 가문 중 하나였다. 김 씨 가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로이 네와 에디 네, 즉 정환의 집을 생각했고 우성알파 가문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정환의 아버지는, 운동권 대학살 때 반기를 들고 나섰고, 그 일을 계기로 알파와 우성알파들이 우글거리는 유력가 층에서 배제되었다. 저택은 붕괴되었고 정환의 가족은 피난하듯 도시 외곽으로 내려왔지만 정환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걸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정환에게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정환은 머리가 크며 실속 없는 빈껍데기 같이 느껴지는 에디란 이름을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당한 것만은 앙갚음 하고 싶었기에 스스로 국가의 군에 들어가 유력가 층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들은 여전히 정환의 일족을 씹어댔으나, 정환의 재기로 그것도 이제 뒤에서나 해야 하는 찌질한 상황을 면치 못했다.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목으로 고소라도 당한다면 그 목숨은 이미 처형대 위에 있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또한 세상 역시 신정부가 들어서며 몇 십 년 사이에 피지배층에게 좀 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회로 진화했기에, 웬만한 가문이 아니라면 인종만으로 모든 걸 주무를 수는 없게 되었다.
한편 베타 대학살 사건에 가담해 피를 본 집안 역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준영의 가문이었다. 사건 당시엔 국가도 이 일에 큰 관여를 하지 않았으나, 신정부 세력이 등장하며 문제는 불거졌다. 가담한 집안들이 뒤꽁무니를 뺐다고 해도, 주동자 세력이었던 정 씨 가문은 신정부 세력에 그대로 뒤를 밟히고 말았다. 삼대 멸족까진 아니어도 재산을 압수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날 위기에까지 쳐했으나, 로이 네 가문이 보증을 서며 정 씨 가문은 명예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로이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로이의 아버지가 잡은 기회였다. 준영의 아버지는 위신을 지키는 것에 급급해 눈이 돌아가 있었고 로이가 오메가란 사실을 아는 것도 준영 하나였기에, 사실상 이 거래는 로이의 아버지와 이십대에 막 들어선 준영의 거래나 다름없었다.
준영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이었기에 로이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확실히 그 일을 계기로 그의 가치관엔 변화가 생겼다. 알파, 베타, 오메가? 그걸 구분하고 차별하는 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흘러가는 물처럼 살아지는 대로 살던 준영은 여전히 삶이 흐르는 방향으로 살고 있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흘러가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향인 집안의 아들들은 나름대로 괜찮은 사이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기득권층에서 빠진 지는 오래 됐지만, 정환은 보통의 알파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준영이 마음에 들어 그와는 계속해서 연락을 했다. 준영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은 가치 있는 정보가 되어 혁명파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준영은 정환처럼 베타와 오메가들, 그리고 평등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쓰레기 같은 알파 녀석들 보단 정환이 훨씬 낫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자신의 이야길 종종 정환에게 털어놓는 이유였다. 그리고 오늘 역시 정환에게 전할 것이 있어 이곳에 들른 것이다. 준영은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져 새하얀 봉투를 정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야?”
정환은 봉투를 뜯으면서 물었다. 정환의 얼굴엔 선물 포장을 뜯는 아이의 호기심이 비쳤으나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김태현이 누구야?”
“화류계 일짱이시랜다.”
“참 나....... 로이 녀석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새하얀 봉투는 결혼식에 딱 어울리는 청첩장이었다. 정환은 청첩장을 접고 다시 봉투에 넣어 바닥에 휙 던졌다. 준영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걔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냐.”
“형은 뭐라도 아는 눈친데?”
“알긴....... 뭐, 로이 킴이 씨를 위해 오메가를 들일 녀석이 아니다, 라는 것 정도는 자신하지.”
정환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방금 전의 과오를 덮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웃으며 반응했다.
“그러니까 난, 형이 로이에 대해 그렇게 자신할 만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거야.”
준영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환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단지 그것 때문에 멍하니 정환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로이가 결혼한다는데. 아무렇지도 않냐고.”
준영은 눈동자로 크게 원을 그리더니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알파끼리 붙어먹는다고 뭐가 될 리도 없고. 니 생각 같은 그런 거 아냐.”
“웬일이셔? 난 형의 가치관은 사랑이 인종보다 우선인 줄 알았는데.”
“뭐.... 그거에 대해 기다 아니다, 당장 단정 짓지도 못할뿐더러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지. 확신을 줄만한 계기도 없었으니까.”
그리 말하고 준영은 정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랑이 인종보다 우선인 건 너겠죠.”
아리송한 말에 정환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준영을 보면, 준영은 닫혀 있던 정환의 방문을 활짝 연다. 그곳엔 승우가 서 있었다.
“니 꼬맹이한테나 잘 해라. 난 간다.”
준영은 인사치레인 것 마냥 승우의 머리를 몇 번 헤집고 현관으로 갔다. 그는 나가기 전에 ‘웬만하면 결혼식 그냥 와줘라.’라고 말해 기별꾼의 의무를 다 했다.
정환은 채우다 만 셔츠 단추를 채웠고 승우는 노려보듯 작은 눈에 힘을 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준영과는 신나게 떠들었으면서 자신은 오자마자 냉대라니. 십대 청소년이 아니라도 사람이라면 열 받을 만한 태도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해요?”
“...어른들 얘기야.”
셔츠 단추를 다 채우자 정환은 방을 나가 부엌으로 향한다. 승우는 볼에 바람을 넣고 그런 정환을 쭐래쭐래 따라간다.
“뭐? 준영이 형이랑 로이 킴이랑 그렇고 그런 거?”
“너 정말.”
정환은 물통을 꺼내다 말고 승우를 쳐다본다. 드디어 봤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승우는 눈에 힘을 빼지 않고 정환을 직시했다.
“왜요, 나도 이제 다 컸다구. 형 생각처럼 마냥 어린 애 아니........ 읍!”
어느 새 승우의 뒤쪽으로 다리를 뻗은 정환은 오금을 툭 쳐 승우를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곤 놀란 승우를 향해, 정확히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승우의 얼굴을 향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승우는 일순 숨을 멈추고 최대한으로 커졌던 눈을 꼭 감았다.
“눈은 왜 감으실까.”
정환의 말에 눈을 뜬 승우는 팔을 뻗어 식탁 안쪽에 놓인 컵을 집는 정환을 볼 수 있었다. 한 순간에 골이 풀렸던 승우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이번엔 씨익씨익 가쁜 숨까지 내쉬었다.
“아, 누구 놀려요!?”
“아직 키스할 타이밍도 모르는 거 같은데, 애기야?”
타들어가는 승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환이 웃으며 말했다. 이윽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정환은 승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곤 다시 집을 나섰다. 승우가 어디 가냐고 소리를 지르며 몇 번이나 물었지만 정환은 묵묵부답. 집 주인은 아무도 없는 빌라에 홀로 남겨진 승우는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대충은 안다고.......”
키스할 타이밍은 맞추지 못했으나 승우는 정말로 지금 정환의 목적지는 알고 있었다. 승우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와 가까이에 있는, 번화가에서 가장 잘 나가는 퍼브. 승우는 치솟는 짜증에 발만 동동 굴렀다.
-
이야기에서 제일 순수?솔직?한 건 준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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