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준영이라고 하는데, 그쪽이랑 친해지고 싶어요.”
얼떨떨해 있는 상우에게 준영이 던진 말이었다. 준영은 상우가 음악 공책에 뭔가를 끄적이는 것을 보곤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상우도 항상 기타를 메고 오는 준영에게 호기심이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당황스러워 하는 상우에게 준영은 등 뒤의 기타를 가리키며, 아 나도 음악하거든요, 라고 덧붙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엉뚱함에 상우는 졌다는 표정으로 웃어버렸다.
준영은 상우의 웃음이 승낙의 의미인 걸 알아차리곤 카운터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괜찮아 괜찮아, 친구라고 하면 돼. 뭐 우리 이제 친구할 거잖아? 준영은 자신이 밴드 보컬이며 돈벌이로 강사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잘해서보단 나 좋다고 다니는 애들이 더 많지만. 또 기타를 꺼내 쳐보려고도 했지만 그러기엔 카운터가 너무 비좁았다.
상우는 준영이 하는 모든 말이며 행동이 재미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가장 오래 웃은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상우는 자기가 미국에서 살았었으며 지금은 사촌 형과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형도 강사 일을 했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왔으면 영어 이름도 있어?”
“네. 로이킴이요.”
“로이? 괜찮네. 그럼 난 로이라고 부를래.”
농담 따먹기가 거의 대부분인 대화였지만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상우는 태현과 있을 때도 느끼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본래 자신이 갖고 있는 장난기 비슷한 것을 부리고 싶어진 것.
준영은 밴드 멤버들에게 연습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전화를 받고나서야 편의점을 나섰다. 나가면서 내일 또 보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준영이 떠나고 나서 의자 한켠에 놓인 자신의 노트를 보며, 상우는 오늘 세 양아치들이 찾아왔던 일이 아득해졌음을 느꼈다.
Profiteroles Au Chocolat
6.시선이 마주치는 시간
연습실에선 저번 회의 때 정한 노래 중 하나인 Fly me to the moon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현우가 태현에게 창피를 줬던 곡이라 괜찮겠냐고 물어봤는데 뜻밖에도 태현은 바로 찬성했다. 첫 공연 때 할 곡인만큼 대중적인 노래를 하고 싶고, 또 엄청 잘 불러서 현우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다며. 미안해하는 현우에게 농담이라고 말은 했지만 잘 불러 보이겠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럼 다음은 Autumn leaves로 가자.”
Autumn leaves는 Bing Crosby가 부른, 저번 모임 때 현우의 의견으로 정한 곡이었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가사만큼이나 원곡은 루즈하고 슬픈 느낌이지만, 네 명은 레스토랑의 손님들이 가볍고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좀 더 밝게 하지만 스윙재즈 같진 않은 느낌으로 편곡했다.
태현은 노래를 부를 때 몸을 살짝 기울여 부르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래서 자신의 왼편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현우와 자꾸 눈이 마주쳤다. 신기한 건 그럴 때마다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는 것이다. 건반 위치와 현우가 서 있는 각도가 태현 쪽을 향해 있긴 했지만, 현우가 줄곧 태현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무슨 생각을 하면서 태현을 보는 건 아니었는데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노래하는 발음이 또박또박하단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입도 크게 크게 벌렸고 신기하게도 그 입 모양이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 노래에 맞게 팔 동작을 하거나 다리로 리듬을 타거나 했는데, 마른 몸이 그러고 있으니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태현과 눈이 마주칠 때면 살짝 웃어주었다. 그러면 태현은 눈을 휘어서 노래할 때보다 더 활짝 웃어주었다.
그들은 Autumn leaves를 어느 정도 익숙하게 할 때까지 맞춰보다가 연습을 마쳤다.
“김현우랑 태현이는 많이 친해졌나보더라. 둘이 자꾸 눈 맞추고 말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재흥이 말했다.
“어? 그랬어?”
“아 진짜?”
가람과 태현이 동시에 물었다.
“어어. 둘이 완전 눈 맞았더만.”
“몰랐냐? 내가 태현이한테 완전 반했잖아.”
태현, 가람, 재흥, 현우 순으로 길을 걷고 있었는데 현우가 태현의 곁으로 가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하하. 그게 뭐야. 아 웃겨.”
태현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웃어댔다.
‘어.. 생각보다 되게 가녀리네. 어깨가 좁아서 그런가.’
현우는 들썩이는 태현의 어깨를 놓지 않으며 그리 생각했다. 말라서 뼈가 만져졌고, 한 손에 어깨가 다 들어올 정도였다. 현우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 다다를 때까지 태현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연습한 날은 며칠 되지도 않는데 태현은 음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분위기며,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래서 유독 레스토랑에서도 존댓말과 반말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만 해도 베이커리에 재료를 대신 갖다 주는 현우에게
“아, 고마워.”
라고 말해버렸다. 그걸 들은 베이커리의 견습생이 놀라서 두 사람을 흘끗 돌아보았다. 현우는 조리대 너머에 있는 태현에게 이리 와보라고 손짓한 다음 ‘레스토랑에선 존댓말 해야지.’라고 귓속말로 말했다. 태현은 ‘맞다 맞다’하면서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콩 쳤다.
손을 씻다가 그 생각이 난 현우는 입 꼬리가 귀에 걸린 채로 피식피식 쪼갰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미쳤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혼자서 즐거워 보였는데, 마침 대광이 화장실에 들어오고 말았다. 대광이 들어온 줄도 몰랐던 현우는 대광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거울로 비친 대광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부주방장님 사람 참 잘 놀래키시네요.”
“하하. 아니, 셰프님이 너무 즐거워 보이시길래요.”
“아.. 흐흐.. 뭐 그냥 좀.......”
현우는 손을 마저 씻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러곤 대광을 마주보았다.
“밴드는 잘 돼가요?”
“네. 다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신나고..”
대광이 먼저 밴드 얘기를 꺼내니, 현우는 대광도 음악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다들 기대하고 있는 거 아시죠? 무대 빨리 보고 싶네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현우는 인사를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이런 대화를 화장실에서 하다니. 생각해보면 레스토랑은 직원 여러 명과 대화라는 걸 하기엔 너무 바쁘고 정신없었다. 아니, 실은 현우 혼자만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일부러 음악과 멀어지려 개인 휴일도 마다할 만큼 이 일에만 치우쳤었으니까.
‘직원들이 내가 요즘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제가 생각해도 달라진 제 모습에 감탄하며 현우는 남은 점심시간을 밴드 멤버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날 디너에 직원들로부터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나올 일이 벌어졌다.
주방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갖가지 재료를 손질하고 굽고 볶는 소리며 요리사들끼리 오더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런데 A18번 테이블에서 음식에 머리카락이 있으니 다시 내오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웨이터의 말에 현우가 직접 확인을 해보니 밝은 갈색의 한 뼘 정도 되는 머리카락이 잘라진 고기 사이에 있었다. 웨이터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었지만 현우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웨이터에게서 접시를 홱 낚아채 홀로 나갔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현우의 말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커플이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여자 쪽이 밝은 갈색의 단발이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둘 다 부모 잘 만나 고생 한 번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제가 이 음식을 만든 주방장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제 머리는 이렇게 길지도 않고 갈색도 아니라서요.”
현우가 제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럼 지금 저희가 거짓말을 한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담당 서버도 여기 검은 머리 남자니까요.”
이번엔 현우를 뒤따라온 웨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괜히 성질을 내는 커플들에게 현우는 접시를 다시 내어주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곧 그 웨이터가 접시를 들고 이번엔 지배인과 함께 나타났다.
“또 뭔데?”
“자기는 아 뿌앙(à point, 우리나라의 미디엄 개념입니다)을 시켰는데 이건 비앙 뀌(bien cuit, 우리나라의 웰던 개념입니다)래요.”
“나참.. 내가 뒤집은 고기가 몇 갠데.......”
현우는 접시를 받아들고 고기를 보았다. 흠 잡을 데 없는 아 뿌앙이었다. 게다가 더 짜증이 나는 건 아까 머리카락 사건 때 음식은 이미 3분의 1정도 먹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인의 그냥 하나 더 해주라는 말에 꾹 참고 고기를 다시 구웠다. 그런데 또 웨이터가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아 뿌앙으로 해달래요.”
“씨발 이게 아 뿌앙이지 뭐야? 미디엄 안 먹어봤대? 뭔지 몰라?”
화가 터진 현우는 날고기를 접시에 담아 홀로 나갔다. 웨이터가 현우를 말리려고 했지만 현우가 성큼성큼 빨리도 걸어 나가서 그럴 수 없었다. 현우는 A18번 테이블에 깨질 듯 힘차게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주문하신 등심 스테이크, à point으로 구워드렸습니다.”
현우가 아 뿌앙을 원어민 발음으로 강조해 말했다. 웨이터들은 물론이고 요리사들까지 홀로 이어지는 벽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레스토랑 전체가 술렁였고 그걸 들은 태현도 베이커리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저기 봐요. 셰프 터졌다.”
“어쩐지. 요즘 순해졌다 싶었다고.”
“암. 그럴 리가 없지. 천하의 김현우 주방장이.”
직원들의 비꼼에 태현은 기분이 나빠져 입을 내밀고 홀을 들여다보았다. 팔짱을 낀 현우가 척 봐도 부티가 나는 남자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의 멱살을 잡았다. 태현은 놀라서 요리사들을 밀치고 나와 현우에게 달려갔다.
“저기 손님, 죄송합니다만 이러시면 안 돼요. 현우 씨도 좀..”
태현이 두 사람을 떼어놓고 있는데 마침 지배인이 나타났다. 태현은 남자의 손을 떼어내고 현우에게 팔짱을 껴 주방으로 가려 했다. 지배인은 오자마자 현우를 나무랐고, 손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현우는 지배인을 스윽 보고 태현에게 이끌려 주방으로 돌아갔다.
손님들을 타이른 지배인은 주방으로 들어와 태현을 베이커리로 돌려보내고 현우를 훈계했다. 태현은 제가 혼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무거워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현우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화난 게 아니라 슬퍼 보였다.
디너 타임이 끝나고 현우는 사장실에 불려갔다. 뒷정리를 하던 가람과 재흥, 태현은 한 자리에 모여 고개를 푹 숙인 채 사장실로 가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김 셰프님, 주방에선 상관 안 하겠다고 했지만 홀에서는 그러시면 안 돼죠. 한두 번도 아니고 대체 왜 그러십니까?”
“...죄송합니다.”
“요즘 성격 좋아졌다고 직원들이 그러던데 아니었습니까?”
“.......”
혼나는 중이었고, 아까도 잠시 생각했었지만 정말 그랬다. 총주방장이 따로 있는데도 주방에선 자신이 폭군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언성을 높이는 일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게 태현이 들어올 즈음부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이 현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계속 이러시면 정말 부주방장님을 주방장으로 승격시킬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는 본인이 더 잘 알겠죠.”
부주방장 대광이 주방장이 된다면 현우는 당연히 부주방장으로 강등될 것이었다. 현우는 어금니를 깨물고 코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음악 대신 이 길을 선택하고 음악을 잊기 위해 얼마나 용을 쓰며, 피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던가.
그래도 태현 씨가 말렸으니 다행이네요. 오늘은 이만 가보세요. 앞으로 주의해주시고.
사장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현우는 고개를 까딱하곤 사장실을 나왔다. 뒷정리가 끝난 건지 주방과 베이커리의 불이 꺼져있었다. 현우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몇 대 태워야겠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탈의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 태현과 재흥, 가람이 있었다.
김현우 괜찮아? 괜찮아?
“현우야.......”
아이들이 괜찮냐고 물었지만 현우는 제 앞에 서 있는, 제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태현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태현은 동그랗게 뜨인 현우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어 놀랐다.
‘왜 그래. 아까 뒷모습부터 이상하게.......’
태현이 현우와 눈을 마주치며 속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 현우가 갑자기 자신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현우가 숨을 빠르고 깊게 쉬는 게 느껴졌다. 태현은 팔을 들어 현우를 안고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현우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재흥은 그런 현우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곤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새끼, 안쓰럽게 왜 그러냐. 가람은 재흥과 달리 현우가 이러는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재흥을 따라 현우의 어깨를 몇 번 쳐주었다. 그런 뒤에도 현우는 한참 동안이나 태현을 놔주지 않았다. 사장이 무슨 말을 했든 애가 이러지는 않을 텐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태현은 아리던 현우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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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헝 제가 수원콘을 갔다왔슴다 ㅜㅜ 싸인회 있다는 얘기 듣고 선물 준비하느라 6편이 늦어버렸어여 흐헝헣ㄱㅇ
그 전부터 6편은 왠지 모르게 잘 안 풀리고 있었는데.. 오늘 댓글들 다시 보니 힘이 뙇 나더라구요!!!! 모두들 감사감사감사합니다 엉어어우ㅜㅜㅜ
안 그래도 똥글인데 성실연재도 아니라 차후가 심히 걱정이 되네요.... 꺼러꺼럮럮럮껄
그럼 재밌게 보셨길 바람미당 ㅋ.ㅋ
아!!!! 그리구 Autumn leaves는 제가 여기에 쓰려고 검색해본 유명한 재즈곡 중 하나인데요
오늘 알고 보니 딕펑스가 슈스케에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더군여 ㅋㅋㅋㅋ
ㄱ..그냥 신기해서....ㄱ냥..그렇다그요...... 히힣ㅎ
-2012.12.31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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