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유쫑




23.특명! 준마허를 지켜라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준면의 아버지 때문에 타오는 며칠 동안 준면의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방을 옮긴 지 얼마 안 된 타오가 중요한 물건만 대충 챙겨 준면의 방으로 오니 그 방에 모여 있던 식구들이 열띠게 의견을 펼치고 있었다.


“이게 두 배로 번거롭지 않아요? 그냥 아버님이 여기서 주무시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찬열이 말했으나 준면은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고개를 빠르게 여러 번 저어댔다.


“너……, 아버지랑 사이 많이 안 좋나 보다.”


준면은 루한에게 답하지 않고 도리어 입을 더 꾹 다물었다. 준면과 그의 아버지가 양자 대면했을 때부터 대충 안 좋은 감을 느낀 식구들은 준면의 침묵이 무언의 긍정임을 눈치 챘다.


“그래도 가서 인사는 드려. 무슨 일이 있으니까 미국에서부터 오셨겠지. 우리 때문에 제대로 인사도 못했잖아.”

“……알았어.”


더 이상 캐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걸 알았기에 민석은 준면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방으로 돌아갔다. 루한이 민석의 뒤를 바로 따랐고 나머지 식구들도 각자의 방으로 떠났다. 타오와 둘만 남게 되자 준면은 침대에 풀썩 드러눕곤 손으로 눈을 가렸다.


“준마허, 괘차나?”


침대 옆에 서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타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면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앓는 듯한 소리로 으응, 이라고 답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타오는 준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침대에 살포시 엉덩이를 걸쳤다. 그러니 준면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앉아 타오의 어깨를 처억 잡았다.


“타오.”

“응.”

“내가 우리 형 얘기했던 거 기억나?”

“다여하지.”

“후……. 아버지가…… 형을 많이 안 좋아하셔. 아니, 싫어해, 엄청.”


준면은 아버지가 싫어하는 게 자기가 아니라 형인 것이 더 슬프다는 듯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준면은 늘 자신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해결해주고 제가 힘들 때마다 지지해주던 사람이었기에 타오는 처음 보는 준면의 모습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준면은 자신이 처음 온 날부터 처음 본 사람답지 않게 살갑게 보살펴 주었는데. 타오는 아직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던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종대의 손에 끌려 온 자신을 준면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거둬갔고, 방에 들어가서는 타오에게 침대를 양보해주고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신경을 덜 쓰도록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배는 안 고프냐, 방은 괜찮냐, 집은 괜찮냐, 한국엔 뭐 때문에 왔냐, 언제부터 오고 싶었냐, 가족들이 보고 싶진 않냐, 고향은 어디고 어떤 곳이냐, 세훈과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하게 됐냐, 종대 얘기는 들었느냐, 게이라는데 어떠냐, 여자친구는 있냐, 대학 졸업하면 뭘 할 거냐 등등. 타오는 게이가 자신의 알몸을 봤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지만 준면이 이미 애인이 있고 행실이 바르고 착한 녀석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금방 안심했다. 또 그 애인이 같은 중국인이라는 사실에 좀 더 마음이 놓이기도 했고 말이다. 질문에 꼬박꼬박 답하던 타오는 어느 새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타오는 반 잠결에 준면의 새로운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던졌다.


“준마허, 근데 책싸에서 게속 뭐 하는 거에어?”

“나? 소설 쓰고 있지. 이런 소란스런 날이면 더 쓰고 싶어지거든.”

“우아- 소설. 근데 나 무서은데 이쪼 보고 쓰먼 안 돼어?”


잠드는 중인 타오는 준면이 소설을 쓴다는 사실에 놀랄 정신이 아니었다. 일단은 자신의 급한 용건을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준면은 피식 웃더니 노트북을 무릎에 내리고 의자를 빙글 돌려 타오를 향해 앉았다. 거마어. 타오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제가 반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발음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는 준면의 말이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려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그 날 이후 타오는 장마가 끝날 때까지 준면에게 신세를 졌다. 같이 자는 건 물론이요, 준면을 2층까지 데려와 자기가 씻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준면은 처음엔 황당해했지만 씻고 나온 타오가 자기 전에 한 말로 쉽게 납득하곤 그 다음부턴 아예 독서거리를 가져가 타오를 기다려주었다. 타오는 종대가 그 알몸을 보고 감탄했듯이 어렸을 때부터 무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겁이 많은 까닭은 추상적인 것들은 몸을 단련해도 육체로는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가, 누가 준마허 괴로비면 내가 때려주거야.”


타오는 자신의 말을 이해해주는 준면이 고마워 그리 말했다. 한국말이 서툴러 표현이 제 마음보다 약하게 나왔지만 정말 진심이었다. 또 준면은 속 시원히 얘기할 수 있는 친구인 세훈과 다르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뭔가가 있었다. 자신의 어리광을 잘 받아주고, 타지 생활을 하는 어린 동생이라 그런진 모르지만 잘 챙겨주고 사소한 일에도 칭찬을 해주는 것이 엄마처럼 포근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우스 메이트들의 따마라고 하는 준면이지만 타오는 그가 마마, 정말 엄마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타오는 더욱 답답했다. 준마허를 도와주고 싶은데 뭘 도와줘야 할지 모르는 자신은 식구들이 놀릴 때나 말하는 0개 국어의 진짜 바보 같았다. 타오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면은 세상 고민거리 다 안고 있는 듯 심각한 얼굴의 타오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속만 끓이던 타오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침대에 누워 허공에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혼자서는 안 되겠어서 세훈에게 상담이나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일어났는데 때마침 준면이 방으로 돌아왔다. 한숨을 푹 내쉰 준면은 급히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준마허, 어디 가요?”


으응. 준면은 힘없이 대답하고 커버에 싸여 있는 양복을 침대 위에 휙 던지고 웃옷을 훌렁 벗어 하얀 셔츠에 팔을 꿰었다.


“아버지 밥 좀 사드리고 오게. 타오, 형 없어도 집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왁스까지 펴 발라 앞머리를 시원하게 깐 준면의 모습은 생소하고도 낯설었다. 오늘따라 준면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 많았지만 타오는 그걸 실감할 새도 없을 만큼 불안해져서, 제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하던 준면을 왈칵 껴안았다.


“돌아올 거죠.”


준면의 어깨 위에 둘린 타오의 팔은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아이의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발음은 비교적 정확했지만 준면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작게 되물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타오.”

“준마허가……, 형가 계속 없는 거면 타어 잘 지키고 이슬 수 없어. 다시 와야 해, 마마.”


……, 그랬구나. 준면은 이 집에서 속이 제일 여린 타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집 잘 지키고 있으라는 건 말 그대로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그 동안 잘 있으라는 거였다. 하지만 타오의 말 덕분에 준면은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확고히 다잡을 수 있었다. 이 집과 이집의 가족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준면은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기 전, 세훈의 방에 잠깐 들렀다. 타오 좀 챙겨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세훈은 처음 보는 준면의 ‘차려입은’ 모습에 놀라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형보다 큰 앨 걱정하고 그래요. 세훈은 괜히 한 번 튕기곤 얌전히 일어나 준면의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렇게 말 잘 들을 거면서. 준면은 흐뭇한 미소로 세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집의 주인인 준면과 이 집에서 제일 어린 세훈에겐 나머지 가족과는 좀 다른 특별한 유대감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을 계기로 생긴 감정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을 만나 의지할 데가 생겼다는 건 그 과정을 무마시킬 힘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이 유대감 역시 종대가 준면을 엄마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고 준면이 그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세훈이 준면에게 제 이야길 털어놓고 위로받고 공감 받을 기회조차 없었겠지만, 그 사건에 있어 제삼자인 세훈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 유대감 덕분에 세훈은 준면이 타오를 더욱 신경 쓰고 보살펴 주는 거라 생각했고 준면의 부탁에 따라 몇 시간을 타오와 함께 보냈다. 점심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점심을 먹으러 간다던 준면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세훈과 타오는 본가에 갔다가 오랜만에 몽구, 짱구, 짱아를 만나고 기분이 좋아져 돌아온 종인까지 껴서는 백현에게 빌린 위 게임을 했다. 지치지도 않고 게임을 하는 타오와 종인을 두고 소파에 앉아 쉬던 세훈은 무심결에 경수의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아- 준면이 형 없을 땐 경수 형이 먹을 거 해주고 그랬는데.”


그리고 말을 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진 몰라도 사이가 좋기만 하던 경수와 종인은 어느 순간부터 멀어져 있었다. 오죽하면 경수가 떠나는 날에도 종인은 인사 한 번 없이 일찍 춤 연습을 가버렸던 건가. 세훈은 주먹으로 이마를 텅텅 치고 제게 등을 보인 채 게임을 하고 있는 종인을 살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게임을 하고 있는 타오와 다르게, 종인은 게임을 하고 있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정말 게임에 집중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기 위해 집중하려고 하는 건지, 눈만 번쩍이는 종인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세훈이 다시 한 번 이마를 치며 자책하고 있는데 현관 중문이 드르륵하고 밀리는 소리가 났다.


“아 무어야- 준마헌 줄 아랐자나.”

“쯔타오, 뭘 또 그러냐. 사람 서운하게.”


종대는 그리 말하면서도 오늘 데이트가 즐거웠는지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 중 종대를 처음 보는 종인은 아침에 진즉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지만 다시 한 번 더 축하한다는 말을 직접 건넸다. 종대는 고맙다고 하며 세훈의 옆에 풀썩 앉았다.


“형이 좀 이해해줘요. 자기 엄마 아니랄까봐 이놈이 준면이 형 엄청 챙긴다니까.”

“내 말이. 근데 형 아버님은? 가셨어?”

“가시긴요. 며칠 더 계실 건지 타오 방에 눌러 앉으셨어요.”

“아……. 오늘 그것 때문에도 싸웠는데.”


종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세훈이 누구랑 싸웠냐며 놀랐다.


“누구긴 누구야. 방금까지 만나고 온 우리 형이지. 근데 뭐 그건 싸운 것도 아니야.”


뭐야, 싸웠다면서. 세훈은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 종대의 모습에 설마 그 싸움이 애정싸움을 말한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눈꼴셔서 입맛만 다셨다. 회상에 빠져 허공을 보며 멍하니 웃음 짓던 종대는 갑자기 세훈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래서 준면이 형이랑 아버님은 진짜 사이 안 좋은 거야!? 지금은 왜 둘 다 안 보이고? 둘이 막 싸우거나 하진 않았지……?”

“하나씩 물어봐요 하나씩.”


세훈이 종대에게 사실을 말해주려고 하는데 다시 현관 중문이 드르륵 열렸다. 이번엔 정말로 준면의 아버지와 준면이었다. 타오는 아버지를 뒤따라 들어오는 준면을 보기 위해 그 큰 키로 까치발을 서며 안간힘을 썼다. 세훈과 종대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종인도 리모콘과 눈차크를 내리며 준면의 아버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타오는 준면을 맞아주기에 바빴다.


“준마허! 왜케 느저써어! 나 키다리다 주글 뻔 했네.”

“어구, 우리 타오 마마 많이 기다렸구나.”


준면은 게임기까지 팽개치고 자기에게 달려와 안기는 타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타오는 그 제서야 준면의 아버지를 흘끗 보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중국인 친구 중 하나구나.”

“얘 이름은 타오예요.”


준면의 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준면은 차갑게 딱 잘라 말하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타오는 싸해진 분위기에 준면의 아버지에게 급히 머리만 조아리고 준면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저 친구가 준면이 형을 워낙 잘 따라요.”


거실에 있던 세 명 중 제일 연장자인 종대가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를 썼다. 뜻밖에도 준면의 아버지는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말을 잘 받아주었고, 아까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으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말을 잘 걸어주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종대는 준면이 제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쌀쌀맞은지가 더 의아해졌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준면은 거실에 있던 세 명에게 저녁 먹었냐고 물으며 곧장 부엌으로 가 앞치마를 둘렀다. 세훈과 종인은 안 먹었다며 지금이 기회다 싶어 자리를 빠져나갔다. 종대는 형이랑 먹고 왔다며 큰 소리로 답하곤 부담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버님을 상대해야겠다고 생각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준면의 아버지도 종대에게 같이 웃어줬지만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네 남자가 떠드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와, 누가 설거지까지 다 했냐. 아까 보니까 거실도 깨끗하던데. 저죠. 야 오세훈! 거짓마 하지 마, 너가 나 시켰자나. 형 저녁 뭐 해줄 거예요? 아버님을 따라 부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종대는 저 대화가 정말 엄마와 아들들이 하는 것 같아 훈훈해졌다. 그래 저절로 미소가 진 얼굴로 준면의 아버지를 슬쩍 돌아보았는데 그는 이제까지 자신들을 친절하게 대해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옆모습을 하고 있었다. 종대는 놀라서 입을 벌렸지만 준면의 아버지가 다시 자신을 보며 들어가서 쉬라고 팔을 두어 번 쳐줄 땐 금방 입을 다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예, 아버님도 편히 쉬세요.”


종대는 사근사근하게 말했지만 방금 전 그 딱딱한 표정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 걱정스런 맘으로 부엌 쪽으로 몇 걸음 옮겨 아이들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저녁을 준비하는 준면을 보았지만 다른 점은 하얀 이마를 드러낸 머리 스타일 뿐, 그 외의 건 평소와 똑같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날 종대는 준면을 뺀 온 식구들의 방을 돌아다니며 준면과 그의 아버지의 사이가 왜 안 좋은지를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누구도 답을 아는 자는 없었다. 세훈이야 알고 있긴 했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기에 모른다고 시치미를 뚝 뗐다. 종대는 할 수 없이 준면의 아버지가 떠나신다고 한 내일에야 준면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크리스에게 전화해 아쉬운 마음을 하소연했다.




준면에겐 더욱 길고 길었던 연휴가 드디어 끝났다. 다시 정신없이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다. 준면은 찬열과 백현의 아침을 챙겨주며 회사에 보냈고, 루한도 커피 세 잔을 만들곤 민석의 출근을 도왔다. 월요일이 공강이어서 늦잠을 자던 1학기의 버릇을 아직까지 못 고친 세훈도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루한과 준면의 커피를 한 모금씩 뺏어 마시고 집을 나섰다.

한바탕 전쟁을 끝내고 준면은 다 식은 커피를 마시며 빨래를 갰다. 그 때 짐을 다 챙긴 준면의 아버지가 방에서 나왔다. 준면은 고집스럽게 아침밥은 드시고 가라며 제 아비의 짐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그를 부엌에 데려와 앉혔다.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아버지라서 식구들에게 해줬듯이 간단히 식빵에 잼과 우유를 내놓았어도 괜찮았겠지만 준면은 새로 한 흰 쌀밥과 남아 있던 미역국을 데워 드렸다.


“누구 생일이냐.”

“생일이었어요.”


그 두 마디를 끝으로 아버지가 밥 반 그릇을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 두 부자는 말이 없었다.


“이렇게 사는 게 성에 차냐?”


아버지가 준면을 보았지만 준면은 아버지가 내려놓은 수저를 내려다보며 그를 마주보지 않았다.


“이렇게 애들 뒷바라지나 하면서 사는 게 좋으냐고.”

“뒷바라지만 하고 있지 않다는 거, 아버지가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래……. 펜 하나 잡고 네 나이에 이런 좋은 집에 좋은 차까지 있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지.”


아버지는 잠기는 목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준면은 이제 수저가 놓인 정면 쪽이 아니라 측면으로 고개를 돌려 제 아비를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도 네 형보단 나아.”

“형도 훌륭한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고작 그 이유 하나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오후부터 수업인 타오는 배가 고파서 일어났는데 준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나가지 못하고 문에 귀를 갖다 댄 채 바깥 소리를 엿듣고 있기가 한참이었다. 원래는 아버지가 집을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려 했지만 준면과, 본 적도 없는 그의 친형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에 타오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타오는 까치집을 지은 머리도 아직 정리하지 않았고 세수도 하지 않았고 퉁퉁 부은 얼굴의 붓기가 빠지지 않았다는 것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끼어서 죄송한데, 준마허가 없으면 우린 잘 살지 모탈 거에요!”


타오의 갑작스런 등장과 깜짝 발언에 힘없이 떨어져 있던 준면의 고개가 번쩍 일어났다. 타오는 깜짝 놀란 두 부자의 얼굴이 닮아 있어서 잠시 당황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봤죠? 마마 업스면 이 집도 없고 우리도 안 돼어.”


타오는 씩씩거리면서, 외국어로 얘기해 좀 더 박력 있게 말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준면의 아버지는 타오를 한참 올려다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짐 가방이 놓여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아버지를 따라 일어난 준면은 타오의 엉덩이를 툭툭 쳐주곤 바깥까지 배웅을 나갔다. 잘못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타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아직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신발을 신은 준면의 아버지는 그런 타오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까지 해주었다.


“고모님껜 제가 다시 한 번 연락드릴게요.”


준면의 아버지는 친가에 이틀 더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준면은 콜택시에 아버지를 태우고 문을 닫기 전 그리 말했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준면의 아버지가 문이 닫히지 않도록 손잡이를 잡았다. 준면은 할 말 있으시냐는 듯 문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다음엔 내 마음이 좀 더 움직일 만한 이야기이길 기대한다.”


‘좀 더’라니. 그렇다면 이제껏 준면이 써온 이야기에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은 움직였다는 뜻일까. 준면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자신을 인정한 아버지가 너무나 뜻밖이라 문을 닫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버지는 멍한 준면을 밀고 스스로 문을 닫고 택시를 출발시켰다. 택시가 떠나며 남기고 간 매연 냄새가 코에 닿자 준면은 서서히 허리를 폈다. 멍했던 얼굴에 뒤늦게 씨익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늘 저녁도 특식으로 준비해 볼까.”


주말도 쉬는 날도 아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다. 다 함께 모여 있으면 시끌벅적, 정신없기도 하지만 그게 준면이 좋아하는 풍경이고, 그 풍경에 함께 녹아드는 게 준면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준면은 이 셰어하우스를 포기할 수 없다. 준면의 판단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활짝 기지개를 켜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면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있는 먹보 타오에게 루한과 종대와 이씽이 잘 했다며 등을 팡팡 쳐주고 볼을 꼬집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준면은 용기 있게 말한 타오가 고마워서 빙긋 웃고는 나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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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12
Posted by Ne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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