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엑소

[카디] 아홉수, 시월애(十月愛 혹은, 時越愛)

Neese 2015. 7. 2. 05:44
아홉수, 시월애(十月愛 혹은, 時越愛)


W.유쫑






도경수. 그는 스물아홉 살의 미술학원 강사다. 싫은 건 싫다, 못하는 건 못한다고 말하는 딱 부러지는 성격 때문에 그에게 심한 말을 듣고 학원을 관두거나 미술을 접은 학생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 때문에 경수 역시 이 학원 저 학원을 옮겨 다녀야 했다. 하지만 일터를 전전하던 것도 꽤 오래된 이야기. 지금은 아는 형인 크리스가 하는 학원에서 근무 중이다. 크리스가 학생들 기죽이지 말라고 단단히 이른 탓도 있고, 경수도 크리스 체면을 생각해 지나치게 심한 말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1년 반 동안 여기에 잘 붙어 있다.




그런 경수에게 5년 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상처가 있다. 29년 평생, 경수가 제 성격을 제대로 못 편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박찬열. 첫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의 시큰둥한 행동에도 늘 웃어주고 맞춰주던 찬열이라 경수도 어느 샌가 찬열에게만큼은 무심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찬열이 무심코 하는 말이나 접촉 따위가 그가 양성애자임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찬열을 향한 경수의 마음은 점점 핑크빛이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경수와 찬열이 벌이고 있던 술자리에 경수의 오랜 친구 백현이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찬열은 워낙 싹싹한 성격이고 백현도 낯가림 없이 방정맞다 보니 분위기는 꽤 괜찮게 흘러갔다. 그런데 경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찬열의 마음을 떠보는 백현. 짝사랑하는 친구가 내심 딱했던 마음이 취중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조금씩 떠보다가 '그럼 너 경수는 어때?'라는 마지막 말에 찬열은 경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 경수를 피했다. 경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시원하게 고백을 해버렸다. 결과는 역시 처참했다. 양성애자라며, 동성애에 편견이 없다며 잘도 떠들어대던 찬열은 경수를 피하는 걸로 모자라 벌레 대하듯 멀리 했다. 그냥 친구로만 남아줬어도 됐잖아. 속상했던 경수의 마음은 찬열을 미워하게 되는 데까지 이른다.

그 때가 9월,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후로 경수는 9월만 되면 괜히 우울해지고 실기 대회를 앞둔 고등학생처럼 예민해진다.




어쨌든 크리스와 약속도 하고 본인이 노력한다 해도 본디 성격이 어디 쉽게 가겠는가. 학생과 학부모의 도 선생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자 크리스는 경수를 성인반 강사로 넣어버린다. 동년배나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게 처음이라 경수는 이 자리가 어색하고 어려웠지만 한 달쯤 지나니 이게 저에게 더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시’라는 부담이 없는 이들을 가르치니 쓴 소리 하는 경우도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서로 기분 나빠하고 얼굴 붉힐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훅훅 찌는 8월 초순. 경수가 완벽히 적응한 성인반에 인상이 차갑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남자, 종인이 들어온다. 훤칠하게 잘 생겨선 미술과는 거리가 먼 듯한 외모인데 기초를 시켜보니 곧잘 한다. 반팔 티 바깥으로 뻗은 길쭉한 팔이며 여름철 얇은 옷이 채 가리지 못한 몸이 잘 빠져 있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춤을 춘단다.


"춤추는 데 미술학원은 왜 다녀요?"

"춤추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서요."


종인이 답하며 빙긋 웃었다. 워낙 딱딱한 인상이었기에 종인의 웃는 모습을 본 경수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그 웃는 얼굴이 어두운 무표정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아서 더더욱.

앞서 말했듯 경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종인이 수업을 퍽 잘 따라와 잘 한다, 재능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종인은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다. 경수가 좋은 말을 해서 그런지 종인은 경수에게 더 많이 질문했고 더 많이 말을 걸었다. 어느 날은 경수가 종인을 자리에서 일으키고 거기 앉아 그림을 손봐주고 있었다.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저렇게 하라고 경수가 말을 하는데 평소엔 '네' 소리도 꼬박꼬박 하던 종인이 조용했다.


"종인 씨, 듣고 있어요?"


경수가 조금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뒤를 돌며 물으니 경수의 눈앞에 종인의 커다란 스마트폰이 처억 놓인다. 경수는 화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화면엔 단순하고 간략하지만 척 보기에도 경수처럼 생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나라구요?"

"네. 똑같죠."

"비슷해요. 아무리 봐도 실물이 더 나으니까."


경수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니 종인이 황당함에 웃는다. 이리 와보세요. 경수는 종인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다시 책상으로 몸을 돌렸다. 종인이 슬금슬금 경수 옆으로 오기 전, 경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던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후로 종인의 스케치북에서 경수는 자기 자신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2등신, 3등신, 5등신 따위의 경수 캐릭터나, 경수의 동그란 눈이나, 웃을 때 하트 모양이 되는 입 따위가 종이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었다. 경수는 자신이 종인 앞에서 입이 하트 모양이 될 정도로 크게 웃은 적이 있었나, 싶었지만 종인이 그렸으니 그랬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날이 갈수록 질이 훌륭해지는 종인의 낙서를 보며 경수는 흐뭇하게 웃곤 했다.

종인을 비롯해 성인반 수업은 순조롭게 돌아갔다. 그것은 시간도 순탄하게 흘렀다는 것을 뜻했다. 장마가 가시며 8월의 무더위도 막을 내리기 시작했고 더위가 꺾이며 9월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경수에게 그 9월의 시작을 알린 건 시계도 달력도 아닌 악몽이었다.


네가 부담스러워. 불편하기도 하고……. 미안.


찬열은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저보다 작은 경수의 눈은 바라보지 않으며 말했었다. 말은 생기 없는 목소리로 뱉어졌지만 날카롭게 되살아나며 경수의 가슴을 찔렀다. 스르르 눈이 떠진다. 방은 새벽빛으로 어슴푸레했다. 힘겨워 보이는 제 거친 숨소리를 듣다가 경수는 눈가가 촉촉해져 있음을 깨닫는다.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보니 새벽 다섯 시를 향해가는 중이다. 그리고 전자시계 옆에 쓰여 있는 날짜는 9월 1일. 오지 않길 바랐던 9월이 결국 다시 오고야 말았다. 제가 죽지 않는 이상 9월은 올 걸 알면서도 실낱같던 희망마저 끊어버린 무심한 시간에 경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선생님 밤에 안 잤어요?”

“네……?”

“아니면 어디 아프신가.”


종인은 옆에 서서 제 그림을 보고 있던 경수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무엇이든 관통시킬 듯한 종인의 눈빛에도 경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꼼짝 않았다. 이쯤 되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고 아니라고 말하는 게 정상인데. 미술 학원에 발을 들인 지 한 달, 그것도 일주일에 세 번만 나오는 종인이었지만, 그 때마다 마주치는 사람의 습관 정도를 파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경수는 종인이 마지못해 일어나 제 이마에 손을 짚어보려고 할 때서야 정신이 퍼뜩 들어 뒷걸음질 치며 답했다. 종인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정신이 든 경수에게 종인의 나른한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종인은 다시 스케치북 위로 손을 움직였다.


“그거 알아요? 쌤은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요.”

“…그런가.”


이목구비가 뚜렷한 거랑 감정이 드러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경수는 그리 생각했지만 말을 섞을 기분이 아니라 적당히 대꾸했다. 종인 씨 관찰력 좋다. 다른 수강생이 종인에게 하는 말을 뒤로 하고 경수는 교실을 나왔다. 종인은 경수가 나가고 닫힌 문을 예의 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악몽의 영향으로 영혼 없이 수업을 마친 경수는 퇴근 준비를 하던 중 크리스를 따라 상담실로 들어가는 종인을 보았다. 오늘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컴플레인이라도 넣는 건가 의심이 들었지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고 무기력한 심신이었기에 될 대로 되라 하며 학원을 나왔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크리스는 경수가 상상하지도 못한 말을 전했다.


“종인 씨가 크로키를 하고 싶어 해.”

“크로키를? 그걸 혼자서 어떻게 해요. 모델 세우려면 다 같이 해야 하잖아.”

“그렇긴 한데. 동세 연습 때문에 그러는 것 같더라고.”


춤추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서요. 경수의 머릿속에 그림을 배우는 이유를 말하던 종인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렇지, 학원에서 개인 과외를 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면 책자도 있잖아요.”

“수업 내내 하는 게 아니고, 매일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는 걸 원하니까 그 모델 정도는 네가 서도 되지 않을까?”


코앞으로 다가온 미대 수시 접수 기간에 잔뜩 초췌해진 크리스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일단은 네가 좀 해줘야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것 같아 경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9월의 두 번째 날, 바로 그 저녁부터 경수와 종인의 크로키가 시작되었다. 희망자는 같이 해도 됐지만 일단 오늘은 종인밖에 없어 둘은 비어 있는 초등부 교실로 나왔다. 크로키는 처음이라는 종인이라 경수는 일단 기본적인 포즈부터 잡았다. 막상 그린 걸 보니 처음 하는 거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한 편이었지만.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하라는 말과 함께 크로키북을 돌려주었는데 종인은 그걸 받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머지 그리러 가야죠. 안 들어가요?”

“나 잘 했죠.”


생긋 웃는 종인에게 경수는 눈을 크게 떠보였다.


“아니, 그린 거 보면서 분명히 잘 했다는 표정이었는데. 따로 말을 안 해줘서요.”


잘 했다고 느끼는 데에 표정이 따로 있나?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제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감정이 다 드러난다느니 어떻다느니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남의 표정을 읽어낸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잘 했냐고 확인받는 모습에 경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일까 자만일까. 어느 쪽이든 미워 보이진 않는다.

그 후로 2주가 갔고 종인이 월화금요일에 학원을 나오니 크로키 수업은 7번이 더 있었다. 크로키는 정밀 묘사보다 사물의 동세나 특징을 중시하였기에 하루에 10분에서 15분만 투자한 걸로도 종인의 크로키북은 빠르게 채워져 나갔다. 희한한 것은 크로키 모델로 경수를 그리는데도 스케치북의 낙서는 계속된다는 거였다. 경수는 몇 번이고 반복되면서 매번 다른 모습의 낙서들을 보며 웃음을 훔쳤다. 그건 몇 년 동안 9월엔 웃는 일이 거의 없던 그에게 생긴 작고도 큰 변화였다. 다만 그 낙서가 워낙 사소한 것이었고 그걸 보고 웃는 것도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기에 경수 자신은 그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건 오히려 종인이었다. 학원에 다닌 지 고작 두 달이 되어가는 시점이라 ‘진짜’경수가 자신이 처음 만난 한여름의 사람인지 요즘의 무기력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어둡게 바뀌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마 무덥기만 했던 날씨가 풀리기 시작한 즈음부터인 것 같았다. 경수는 지나치게 솔직해 독설에 가까운 평을 내뱉곤 했지만 그만큼 칭찬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즉 예전의 그는 얘기할 건 얘기하고, 다양한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감정도 풍부하고, 종인이 툭툭 내뱉는 말에도 잘 웃곤 하는 사람이었는데 요 며칠 간은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기 일쑤였다.

크리스에게 경수를 모델로 크로키를 해보고 싶다고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댄서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에 크로키가 도움이 될 것은 뻔한 사실이었기에,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점을 이용해 경수에게 생긴 변화를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게 의식을 하고 주의를 기울여 경수를 살펴보니, 자기가 스케치북에 아무렇게 해놓은 낙서에 작은 웃음을 짓는 경수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크로키 여덟 번째 수업이 있던 날. 그 날은 경수의 9월 전체를 어둡게 점철해버린 단 하루의 날이었다. 지난 5년과 다르게, 올해 경수는 9월 1일을 제외하곤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그 날만은 예외가 없었다. 오히려 경수 자신이 전날부터 ‘내일은 그 날이야. 내일은 그 최악의 날이야. 내일은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야.’라고 되뇌며 악몽을 부추겼다고도 볼 수 있었다.

크리스는 초췌하다 못해 창백한 경수를 보곤 작년 가을에도 이렇게 안 좋은 상태를 보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일터는 일을 하는 곳이지 제 기분대로 들락날락거리는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성인반 수강생들이 많은 금요일이라 경수를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단순히 친한 형이 아니라 고용주로서 크리스가 경수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건 그가 경수를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에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경수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종인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아프냐고 물어도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경수여서 마음이 답답해지기만 했다. 종인은 결국 크로키북을 의자에 타악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경수에게로 다가왔다.


“아직 시간 안 됐는데. 다 그렸어요?”

“모델 자세가 불량이라 도저히 그릴 수가 없어서요.”


그리 말한 종인은 아무 예고도 없이 경수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왼쪽 팔과 어깨는 뒤쪽으로 빼고 오른팔은 들어 올려 팔 안쪽으로 45도 쯤 접게 했다. 배를 안쪽으로 쑤욱 밀어 넣어 허리를 구부리게 했고 다리도 살짝 구부리게 한 다음 왼쪽은 앞으로 쭉 펴게 해서 바닥에서 조금 띄우게 했다.


“이렇게 있어 봐요.”

“뭐하는 거예요?”


경수가 물었지만 종인은 경수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턱 밑에 손을 대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도톰한 입술이 비죽 나온 게 제가 원하는 자세가 만들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안 되겠는지 결국 제가 직접 그 포즈를 취해 보이며 따라해 보란다. 춤 동작의 일련인 듯한데 춤이라곤 대학교 새내기 때 오티에서 억지로 춰본 게 전부인 경수가 제대로 각을 잡을 리가 만무했다.


“이게 락킹이라고, 이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혹시 춤을 보여주면 감이라도 잡을까. 싶어서 종인은 경수가 어정쩡하게 시전했던 동작에 이어서, 눈이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손목과 팔을 돌리고 꺾었고 다리도 바쁘게 움직였다. 종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균형 잡힌 몸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몸으로 춤을 추는 걸 직접 보니 경수는 황홀경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늘 크로키를 하는 곳은 성인반 교실 옆이며 입시반 교실 앞인, 홀처럼 뻥 뚫려 있는 곳으로, 이른 오후에 초등반 아이들이 쓰거나 입시반에서 진도와 다른 것을 그리는 학생 한두 명이 쓰곤 했다.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 있진 않아도 입시반 교실에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곳이라는 것. 춤추는 종인을 본 한두 명의 학생들이 소곤거리니 곧 모든 아이들이 종인을 보게 되었다. 입시반 교실에서 학생 한 명을 봐주고 있던 크리스는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보곤 너희 실기 자신 있나보다며 적당히 타일렀다. 크리스의 목소리에 괜히 눈치가 보인 경수는 종인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알았어요, 이렇게 하면 되잖아 이렇게.”


경수는 종인이 처음에 잡아줬던 자세를 혼자 열심히 재현해보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확실히 처음보단 나아졌지만 아직도 어색함이 남아 있는 몸에 종인은 웃음을 참으며 자세를 조금 고쳐줬다. 종인의 춤이 멋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이들이 간간이 쳐다보는 중에도 우스꽝스런 자세를 하고 있기 때문일까. 우울과 무기력의 극치에 다다랐던 경수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잊고 이 수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그림을 한 번씩 손봐주고 나온 크리스는 상담실 겸 사무실인 제 자리로 돌아가다가 성인반에서 수강생에게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는 경수를 보았다. 일에도 집중하고 안색도 밝아진 게 여간 다행인 게 아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여태까지 군말 없이 크로키를 해오던 종인은 그 후로 경수에게 대놓고 포즈를 부탁했다. 경수는 처음엔 싫다고 내뺐지만 종인이 시범까지 보여주며 알려주는 터라 더 이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자세를 하나하나 세심히 체크해주는 종인의 정성도 갸륵했고 말이다. 그렇게 일단 시작을 하면 재밌게 잘 하는데, 또 이상한 자세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현실에 경수는 종인이 학원에 오기 전이면 씁쓸하게 웃곤 했다.


“쌤! 이번 기회에 그냥 춤으로 전공을 바꿔보는 건 어때요?”

“또, 또 까분다. 김종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종인에게 자세 교정을 받고 있는데 종대라는 학생이 물을 갈려고 두 사람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실기시험을 앞두고 있는 고3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장난기가 가득 담긴 눈가의 웃음이며 말려 올라간 입 꼬리는 소년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하기야 학생들에겐 원장님보다도 엄한 도 선생에게 저렇게 쉽게 말을 걸고, 경수도 종대의 장난엔 이골이 난 듯한 반응을 보였으니 말은 다 한 거였다.

종인이 크로키도 그 외 수업도 평소와 같이 잘 마친 뒤 경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는데 크리스가 입시반 교실에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다음 주에 뵙자며 종인에게 목례를 하던 경수가 허겁지겁 나오는 크리스를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았다.


“종인 씨, 그럼 또 언제 오시는 건가요?”


또? 또, 라면 당연히 경수가 방금 말한 다음 주, 종인이 학원에 나오는 월요일인데. 믿고 싶지 않은 불안함을 감지한 경수의 눈이 크게 뜨여 종인에게로 향했다. 크리스를 바라보던 종인이 경수를 마주보았다가 다시 크리스를 보았다.


“대회 전까진 안 될 테니까……. 다음 달 중순쯤이겠네요.”

“대회 잘 해요. 저도 애들 대학 잘 보내놓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종인은 웃는 얼굴로 크리스와 경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크리스도 웃으며 목례했다. 오직 경수만이 그 자리에 빳빳이 선 채로 얼어 있었다. 선생님 저 이것 좀 봐주세요. 바로 옆 성인반 교실에서 한 학생이 경수를 불렀으나 경수는 닫히는 학원 문으로 달음박질 치고 있었다.


“종인 씨!”


어차피 작은 건물에 위치한 학원이었기에 문에서 몇 걸음만 더 가면 바로 종인을 잡을 수 있었지만 경수는 다급하게 종인을 불렀다. 마침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종인이 경수를 돌아보았다. 저, 저기, 그게. 경수가 뜻도 없는 말만 더듬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지만 종인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몸은 당장이라도 그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엘리베이터를 향해 있으면서 목 윗부분은 경수 쪽으로 돌아가 있는 채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경수가 간신히 입을 뗄 때, 공교롭게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마찰음이 났지만 다행히 소리를 빽 내지른 터라 어렵게 꺼낸 말이 묻히진 않았다. 엘리베이터도 닫히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두 사람에 실내등도 꺼지자 좁은 복도가 어둠에 묻혔다. 종인은 작은 움직임으로 경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뭘 얘기해요. 어차피 한 달만 있으면 다시 올 건데.”


어두워서 보이진 않았지만 종인이 왠지 웃고 있을 것 같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그냥 그 표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종인은 늘 자신을 웃는 얼굴로 대했으니.


“그렇긴 한데…… 그래도요. 내가 선생이었잖아요.”

“누가 몰라요. 도경수 선생님.”


이번엔 확실히 종인이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제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서운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경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종인이 팔을 위로 이리저리 흔들어 실내등 센서를 자극했다. 깜빡, 하고 불이 들어오니 다시 서로의 얼굴이 보였다.


“나 보고 싶으면 내 스케치북 봐요.”

“그걸 왜 봐요. 거기에 본인 얼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얼굴 못 보니까 내 흔적이라도 보라, 이거죠. 아, 아님 크로키북도 괜찮고.”

“다 두고 가는 거 보니 정말 다시 오긴 할 건가 보네요.”

“그럼, 안 와요?”

“아뇨, 오라구요.”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둘은 실내등이 다시 꺼질 때까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뭣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그냥 즐거워서, 마냥 좋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종인이 버튼을 누르자 문만 닫힌 채 그대로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까지 본 경수가 몸을 가볍게 들썩이며 학원으로 들어가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다시 복도로 뛰어나갔다. 그는 난간에 매달린 채 아래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곧 저 아래에서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대회 잘 해요!”


어둡고 좁은 복도에 경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쌤도 잘 있어요!”


그리고 메아리처럼 종인의 목소리가 경수에게 돌아왔다.










경수는 좀처럼 종인의 스케치북도 크로키북도 펼쳐보지 않았다. 그걸 펴보면 종인의 말처럼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거라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또 종인은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돌아올 텐데 미리 펴보면 그 때까지 무슨 낙으로 기다릴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가만 있자, 그런데 11월 중순이라면 지금부터 겨우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경수는 재빨리 핸드폰 달력을 켜보았다. 오늘 날짜가 부각되어 보이는 핸드폰 달력은 정확히 10월 13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끔찍하고도 지독한 9월이 어느 새 다 가고 이렇게 10월이 소리 소문 없이 찾아와 있었다니. 그것도 꽤 지난 중순의 얼굴을 하고서. 날씨가 추워져서 겨울옷도 꺼내 입었고 개천절이 평일과 겹쳐 얼씨구나 좋아하며 학원도 쉬었다. 그런데 왜 9월이 가고 10월이 왔다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걸까. 작년까지만 해도 9월 마지막 날엔 자정에 맞춰 핸드폰의 날짜가 10월 1일로 변하는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그러고 나서도 후유증처럼 10월 초까지는 끙끙 앓았는데. 심지어 올해도 분명 9월이 되며 힘들어 했었고 찬열과 영원한 안녕을 했던 날엔 스스로를 들볶으며 괴롭히기까지 했었다.


“하… 하하…….”


종인과 크로키를 했던 곳에 앉아 있던 경수는 액정이 꺼진 핸드폰을 든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학원에 도착해 교실로 들어가던 종대와, 수업을 하려고 상담실에서 나온 크리스가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경수 사이로 크리스와 종대의 얼떨떨한 시선이 맞부딪혔지만 경수는 여전히 입을 벌린 채 가만있었다. 단 하나의 생각만이 경수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좋아진 것 같아…….”


크리스와 종대가 입시반 교실로 들어가 경수의 혼잣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만약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입가에서만 맴돌 정도로 작고, 발음이 다 뭉개져 웅얼거리는 소리였기에.

경수는 종인이 앉던 자리에 가 그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을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보았다. 자신이 말했던 대로 그 두 연습장 중 어느 곳에도 종인의 모습은 없을 테지만, 그의 손으로 남긴 흔적을 보고 나면 수업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감정을 깨달은 직후의 어지러운 마음은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경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마음을 다잡곤 수업에 임했다.

경수가 간간이 종인의 빈자리를 응시한 걸 빼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시간이 갔다.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크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이따금씩 울리는 입시반 교실과 다르게,  경수는 수업이 끝나 수강생들이 전부 돌아가고 조명 하나 달랑 켜놓은 성인반 교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는 종인의 책상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서랍에 손을 슬며시 집어넣은 채로 또 한참 있은 후에야 두 권의 연습장을 꺼냈다. 손에 감기는 무게감이 꽤 묵직했다. 경수는 망설임이 남아 있는 손끝으로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선 하나하나가 꼼꼼한 그림들이 답답한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집중하고 열심히 그렸던 종인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가 번졌다. 세 장 정도를 넘기고 나니 그 다음부턴 종이 구석구석에서 제 모습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종인이 처음 그린 제 모습은 그의 핸드폰 속에 있던, 눈이 붕어처럼 동그랗고 입은 하트 모양인 간단한 생김새였다. 얼마나 황당했던가. 핸드폰을 만지는 기척도 없이, 얼굴의 특징만 잡아 간단한 선 몇 개만 그어놓고 ‘똑같죠.’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종인이 떠올라 경수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스케치북의 낙서들도 처음엔 그 핸드폰의 낙서들처럼 간단했다. 하지만 점점 뒷장으로 갈수록 선이 섬세해졌고 실물의 경수를 닮아갔다. 쌍꺼풀이 깊은 커다란 눈, 동그란 코끝, 가지런한 눈썹, 머리칼이 얌전히 놓인 둥근 뒤통수, 연필을 쥐고 있는 손. 심드렁해 보이는 무표정, 설명할 때의 진지한 표정, 개구쟁이처럼 웃는 표정. 그리고 무표정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느낌은 전혀 다른 표정. 경수는 비로소 제가 매년 9월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수업을 하며 그 때 그 때 이 낙서들을 발견했을 땐 종인의 그림 실력이 늘며 낙서 수준도 높아졌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변화가 제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너는 나를 이렇게나 자세히 보고 있었구나. 사물에 정말 큰 관심을 갖지 않거나 보면서 그리지 않는 이상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경수는 종인도 저를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과 그렇지 않고 단순히 그림을 위해 관찰했을 뿐이라는 불안감이 동시에 들었다.

하얗게 빈 나머지 장들을 휘리릭 넘기고 딱딱한 크로키북의 표지를 넘기기 전, 경수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이곳에 무엇이 그려져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낙서 하나에도 버거워하고 있는 자신이 이 딱딱한 표지 뒤에 이어질 무수한 이야기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종인에 의해 그려진 제 모습을 보았다간 그가 그린 모습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자체가 종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종인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봐 겁나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경수는 족쇄 같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게 종인 때문인 걸 알아버렸기에 그 후가 어찌 되든 지금은 이 크로키북을 열고 제 마음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크로키북엔 역시나 경수가 그러져 있었다. 사실 경수가 모델이었을 뿐, 동세를 파악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그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경수는 그림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림에 새겨진 종인과의 시간이 경수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던 것이다. 경수는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살피다가 종이의 귀퉁이마다 적혀 있는 날짜를 발견했다. 9/2, 9/5, 9/8, 9/9, 9/12, 9/15……. 점점 수가 커지는 날짜들이 종인이 학원에 오던 요일에 맞춰 꼬박꼬박 적혀 있었다. 마침내는 9월의 마지막 날인 30일을 지나 새로운 달인 10월에 들어서는 날짜. 종인이 학원을 쉬게 되는 바람에 10월은 한 번밖에 적혀 있지 않았지만 경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애매모호한 표정. 그것은 매년 끔찍하던 9월, 도경수의 아홉수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의 반증이었다.






경수는 그 날 이후 다시는 두 권의 연습장을 펴보지 않았다. 종인의 흔적을 접할수록 그에게 점점 빠져들고 말 자신을 알았기 때문이다. 크로키북에 쓰여 있던, 종인이 쓴 날짜들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착실하게 기록된 날짜들을 보던 단 한 번의 순간, 그것들은 이미 경수에게 큰 의미를 부여했기에 희미한 기억의 종인의 글씨체는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특별한 다짐을 하지 않고 그저 매일을 살며 숨을 쉬듯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그게 종인이란 사람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져 경수에게 아무 것도 없던 것 같은 나날을 돌아볼 수 있게 했고, 그랬기에 그 날들이 경수로 하여금 자신이 ‘살고 있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9월을 극복했다. 일단은 그걸로 만족하고 싶다. 아직은 종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질 정도로 좋아하지 않으니, 종인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기 전까지는 지금의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 종인의 흔적을 좇지 않은 것도, 맘만 먹으면 선생으로서 알아낼 수 있는 전화번호를 따지 않은 것도 지금은 이대로가 좋다는 경수의 마음이 시킨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찬열 때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스물아홉. 한 해가 저물어가며 경수의 아홉수도 끝나가고 있다. 입시반 아이들은 수능을 마치고 실기고사 결과 발표를 기다렸고, 이제 수험생이 될 아이들은 새로운 커리큘럼을 받았다. 차갑다 못해 매서워지는 겨울바람에 학원에선 본격적으로 난방기구들을 틀기 시작했다. 가디건을 걸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손에 쥔 경수는 수업 전,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성인반 교실에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종인의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11월 중순. 그곳에서 경수는 종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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